우리에게는 각자의 교육과정이 있다
누군가 과정과 결과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결과’라고 답하곤 했다. 과정이 중요하다거나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패배자를 위한 야박한 위로거나 달콤한 환각처럼 느껴졌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단 한 번도 결과 앞에서 의연했던 적이 없었다. 업무 성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때도, 선발에서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때도 늘 같은 생각이었다. 나는 과정의 숭고한 의미보다는 눈에 보이는 ‘1등’이 더 좋은, 그런 속물적인 사람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은 단순한 욕심이라기보다 오랜 불신 때문이었다. 관계에서도, 일이나 공부에서도 ‘왜 이런 지루한 과정을 거쳐야 하지?’라는 의구심이 앞섰다. 될 일이라면 길이 술술 풀려야 하는 것 아닌가, 왜 나는 중간에 막히는 걸까 하는 생각들이 피해의식처럼 머릿속을 맴돌았다. 노력해도 안 될 거라는 두려움, 세상은 과정이 아닌 결과만을 기억한다는 냉소. 나는 그렇게 ‘과정’이라는 말을 믿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다 얼마 전, 그 견고했던 불신(불편한 신념)에 균열이 생기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TEPS 시험 독해 영역을 풀 때였다. 전반부의 쉬운 유형을 지나, 육상으로 치면 커브를 돌고 결승점을 향해 최고 마력으로 끌어올려야 하는 후반부 추론 영역에 이르렀다. 평소라면 체력이 떨어져 글자가 겉돌고 숨이 턱 막혔을 구간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문장이 읽혔다. 아니, 단순히 읽히는 것을 넘어 내가 문장을 힘껏 밀고 나가고 있다는 느낌이 손끝에 전해졌다.
‘어떻게 하면 독해력이 오를까, 점수가 좀 나아질까’ 고민하며 꾸역꾸역 읽어냈던 시간들, 허공으로 흩어진 줄만 알았던 그 지루한 훈련들이 내 머릿속 근육이 되어 작동하고 있음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아, 이게 쌓인다는 거구나.”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은 운이나 재능이 아니라, 바로 이 ‘과정의 누적’ 임을 내 몸이 비로소 증명해 보인 것이다.
그 과정의 감동을 나중에야 한 단어로 부를 수 있었다. 쿠레레.
그제야 비로소 교육학 책에서 보았던 파이너(William F. Pinar)의 ‘쿠레레(Currere)’가 활자가 아닌 현실로 다가왔다.
본래 ‘쿠레레’는 경주마가 달리는 경기장의 코스(Track)를 뜻하는 라틴어다. 직선과 커브가 번갈아 이어지는 구간의 객관적 특성이다. 하지만 파이너(William F. Pinar, 교육과정 재개념주의자)는 이를 재해석하여, “단지 구간의 배열이 아니라, 그 코스를 달리는 말이 보고 듣고 느낀 모든 생생한 체험(Running)”이 곧 교육과정이라고 말한다.
나는 그동안 트랙의 끝에 있는 결승선만 바라보느라, 내가 달리고 있는 이 땅의 감촉을 무시해 왔다. 하지만 똑같은 경기장이라도 달리는 존재마다 풍경과 기억은 다르게 쌓인다. 교육과정이란 누군가 설계해 놓은 매뉴얼을 통과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지나온 궤적과 앞으로의 이상, 그 사이를 달리는 현재의 나를 비추며 스스로를 재구성하는 과정이다. 내가 겪은 실패와 상처조차 무의미하게 버려지는 경험이 아니라, 나만의 주법(走法)을 만드는 필수적인 데이터 베이스가 된다. 즉, 내가 배우는 모든 것이 '나의' 교육과정이다. 이런 인본적인 교육의 관점을 본 적이 있는가.
파이너는 ‘자서전적 방법(autobiographical method)’을 통해 개인이 자기 삶을 되돌아보고 또다시 써 내려갈 것을 제안한다. 성과와 업적이 없더라도 과정 속에서 배우고 깨달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곧 훌륭한 교육과정이 된다고 한다. 심지어 실패조차도 교육적 경험이 된다.
이는 교사인 나에게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교사가 먼저 자기 삶을 하나의 텍스트로 읽어내지 못한다면, 어떻게 학생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나 역시 결과가 완벽하지 않더라도, 내 삶의 궤적들은 분명한 일관성과 지속성을 지니며 하나의 이야기로 엮여 있었다.
만약 내 인생이 누군가에 의해 정교하고 완벽하게 설계되었다면, 그분은 ‘내가 언제 무엇을 이뤘는가(Doing)’보다 ‘그 길을 걸으며 무엇을 알게 되었는가(Learning by doing)’에 방점을 찍을 것이다. 쿠레레는 ‘삶의 궤적 전체’를 가리키기에, 그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같은 내용을 배웠어도 그 안에 쌓인 경험은 누구에게도 동일할 수 없다.
그렇기에 나는,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에게 다시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길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텝스 결과가 어떻게 나왔냐고?
안타깝지만 나는 여전히 달리는 중이다. 그리고 원하는 결과를 원한다. 하지만 예전처럼 결과만을 맹목적으로 쫓거나, 과정을 불신하며 불안해하지 않는다.
묵묵히 달려온 과정들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기로 했기 때문이다. 아직 결승점은 보이지 않지만, 커브를 돌고 나면 그 축적된 힘이 나를 마지막 구간으로 밀어 올려줄 것 또한 이제는 믿는다.
지금 내 앞을 막고 있는 듯한 벽조차 끝내는 길을 열어주리라는 사실을.
그 믿음으로 나는 오늘도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