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무용단 [미메시스(Minesis)] 공연 후기
창작무용 공연이 예술가의 사유를 움직임으로 형상화한 예술이라는 걸 깨닫고부터 무용을 보는 일이 훨씬 즐거워졌다. 기본 동작을 따라 하는 것에 그쳤으나 한 때 발레 수업은 삶의 큰 기쁨이었던 적이 있다. 비록 발목 불안정으로 오래 이어가지 못했지만 움직임에 대한 리듬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그 감각은 무대를 마주할 때마다 다시 깨어난다.
그리고 세종문화회관에서 본 서울시무용단의 신작 〈미메시스〉는 그 감각의 깊이를 한층 더 깊게 흔들어주었다.
2층 객석에서 내려다본 무대는 마치 물결 같았다.
무용수들이 서로에게 기대어 불길을 내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이들이 단순히 무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생각하고 또 몸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는 걸 느꼈다.
처음엔 ‘파묘’나 ‘캐데헌’의 흐름에 놓인 작품인가 싶었지만 이들은 그 유행이 오기 전부터 이미 ‘불의 춤’을 준비해 오고 있었다.〈미메시스〉는 유행이 아니라 오래된 감응에서 태어난 작품이었다.
이날의 무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재현’이라는 고전적 개념 <미메시스>를 전통춤으로 불러냈다. 교방무, 한량무, 승무, 태평무 같은 여덟 전통춤이 물과 바람, 하늘과 땅, 그리고 불의 오행으로 새롭게 구성되었다.
그중에서도 무당춤- 불로 형상화하여 신과 인간의 경계를 허무는 듯한 퍼포먼스는 과히 압도적이었다.
무당춤 다섯 마당은 동해안 별신굿, 경기 도당굿, 황해도 철물이굿, 진도 씻김굿, 그리고 서울 재수굿으로 구성되었다. 붉은빛이 천천히 무대를 덮을 때 무용수들의 몸은 불꽃처럼 흔들리며 타올랐다.
무용수들이 신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신의 숨결을 빌려 자신의 몸을 태우는 것 같았다. 몰입의 경지를 향해 가는 장면을 보며 ‘춤이 예술가의 사유를 가장 순수하게 구현하는 언어’ 임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인간과 신, 예술과 제의, 현실과 환영의 경계가 몸이 흔들릴수록 사라졌다. 음악이 멈추어 무용수의 손끝에서 불빛이 터지고 사라졌을 땐 그 사라짐조차 아름다웠다.
특히 눈길을 끈 무대는 서울 재수굿이었다.
무용수의 얼굴엔 계산도 망설임도 없었다. 음악이 시작되자 그는 이미 춤에 잠식되어 신명을 뿜어내었다. 손끝에서 오방기가 부드럽게 흩날릴 때, 그가 안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춤이 그를 추게 하는 듯했다. 완전히 몰입한 자의 신명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순간 무대는 종교도 예술도 아닌 하나의 생(生)의 축제가 되었다.
기억에 남는 또 하나의 마당은 소고춤이었다.
불처럼 타오르던 무당춤이 신의 세계를 열어젖혔다면, 소고춤은 인간의 세계로 돌아와 다시 숨을 고르게 했다. 농번기를 앞두고 풍요를 기원하며 온 마을이 함께 장단을 울리던 농악대의 흥과 염원이 깃든 춤이다.
이 춤의 미학은 절제이다. 팔을 뻗어도 하늘을 찌르지 않고 발을 딛되 땅을 거스르지 않았다. 모든 동작은 낮고 느리지만 결코 느슨하지 않고 움직임의 크기를 줄이는 대신 집중의 밀도를 극대화했다.
그 절제 속에서 나는 한 무용수에게 눈길이 머물렀다.
그의 몸에는 불의 기억이 남아 있었으나 또한 고요했다. 힘을 빼야 할 곳과 모아야 할 곳을 정확히 알아 불필요한 힘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불처럼 타오르던 세월이 근육 안에 스며들어 이제는 스스로를 태우지 않아도 빛나는 경지. 춤을 오래 춘 사람에게만 생기는 느긋한 호흡과 ‘멈춤’에서조차 생명이 느껴지는 위엄이 있었다.
능숙함이란 결국 그렇게 태워낸 시간의 흔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장면을 보며 듀이의 ‘경험’ 개념이 떠올랐다. 그는 진정한 경험이란 단순히 겪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이 다음의 삶으로 이어지며 내면의 구조를 바꾸는 것이라고 했다.
무용수의 몸이 그 말을 증명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되풀이된 동작과 훈련이 그의 근육 속에 시간을 새겨 넣었기에 그것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하나의 사고방식, 존재의 태도로 남아 있었다.
교사로서 나는 그 몸을 오래 바라봤다.
교사의 경력도 그와 닮지 않았는가.
모든 해가 깊이를 남기는 것은 아니다. 수업을 반복하고 관계를 이어가도 사유하지 않으면 근육은 길을 잃는다. 그러나 자기 경험을 매번 새로이 되짚는 교사, 자신의 언어와 행동을 성찰하며 쌓아온 교사에게는 그 무용수의 몸처럼 단단하고도 유연한 근육이 생긴다. 오래 쓰인 근육의 방향과 결처럼 깊이 있는 교사의 몸에도 세월의 리듬이 새겨진다.
결국 교사의 능숙함도 결국 시간의 불을 견뎌내며 태워낸 결과라는 걸 무용수의 손끝이 공기를 그을리는 것을 보며 깨달았다. 무대의 고요 속에서 나는 내 안의 불씨 하나가 다시 깨어나는 걸 느꼈다.
〈미메시스〉는 단순히 전통을 재현한 공연이 아니었다.
불로 시작해 재로 식고 다시 고요로 이어지는 그 흐름은 결국 인간의 생애처럼 느껴졌다. 태어나 타오르고 식고, 또 사라지지만 그 불의 기억만은 오래 남아 또 다른 몸에서 되살아난다. 나는 그날 무대를 보며 ‘춤을 춘다’는 말의 뜻을 다시 배운 듯하다. 춤은 몸을 움직이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 안의 불을 꺼내어 세상과 나누는 일이다.
그래서 그들의 불은 나에게도 옮겨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