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물
회색빛 침묵의 숲으로 침잠하다
브란덴부르크 문을 뒤로하고 몇 걸음 옮기자, 다른 시간의 길목으로 접어든 듯 거짓말처럼 도시의 소음이 잦아들었다. 눈앞에 회색빛 콘크리트의 숲이 말없이 늘어서 있었다. 불규칙하게 솟아오른 거대한 비석의 군집,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물'이다.
설계자인 피터 아이젠먼은 이곳에 2,711개의 콘크리트 기둥을 격자 모양으로 세웠다. 두께 0.95m, 너비 2.38m 제각기 다른 높이로 서 있는 회색 기둥들 사이로 나는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놓았다. 손끝에 닿은 콘크리트 표면은 거칠고 차가웠다. 한 발짝 내딛을 때마다 발소리가 텅 빈 통로를 울리며 공허하게 되돌아왔다. 조형물 속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나는 점점 땅 밑으로 가라앉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맑았던 베를린의 하늘은 거대한 잿빛 기둥들에 가려 조각조각 찢긴 듯했다. 그 조각난 하늘의 날카로움은 금세 숨 막히는 비탄감이 되어 나를 짓눌렀다.
삶의 소음과 죽음의 적막 사이
그런데 그 순간, 지극히 역설적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기둥 저편에서는 아이들이 이 미로가 마냥 즐거운 놀이터라도 되는 양 까르르 웃으며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고 관광객들은 밝은 표정으로 기념사진을 남기느라 분주했다. 죽음을 기억하는 장소 위로 생생한 삶의 소음들이 덧입혀지고 있었다. 하지만 회색 미로 위를 부유하는 그 낯선 활기는 오히려 나를 더 깊은 고립감 속으로 밀어 넣었다. 세상의 소란스러움과 단절된 채, 나는 내면의 소리조차 머물지 못하는 완전한 적막 속으로 점점 더 깊이 침잠해 들어갔다.
'이곳이 이름 없이 사라진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위한 공간이구나…'
아도르노: 침묵은 가장 윤리적인 언어이다
감히 그들을 떠올리는 것조차 죄스럽게 느껴졌다. 어떤 감상도, 위로의 말도 허락되지 않는 압도적인 분위기 속에서 문득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의 말이 떠올랐다.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
예전엔 그 말이 단순히 예술적 금기에 대해서 말한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 회색 미로 속에 서 보니 그 말의 참뜻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거대한 고통을 '아름다움'이나 '치유'라는 이름으로 섣불리 포장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교사로서 나는 늘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자세히 설명하고, 명확한 언어로 정의 내리기 위해 애써왔다. 하지만 나의 그 ‘익숙한 도구’들은 이곳에서 무용지물이 되었다. 아도르노의 말처럼, 거대한 폭력 앞에 언어는 기교에 불과했다. 슬픔을 '슬프다'라고 뱉는 순간 그 감정은 즉시 타자화되고 가벼워져 버린다.
그래서일까. 이곳에는 설명문도, 희생자의 이름도 없다. 오직 그때의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부재(不在)' 밖에 없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죄책감이 엄습해 왔지만 그 감정을 입 밖으로 내는 것 조차 무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현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윤리적인 행위는 오직 침묵뿐이다.
레비나스: 타자의 얼굴이 묻다
회색빛 기둥 사이를 걷는 동안, 문득 이 차가운 구조물들이 죽음을 애도하는 비석이 아니라 죽음을 향해 줄지어 서 있던 사람들의 뒷모습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저마다 다른 높이와 기울기를 가진 돌덩이들을 보며 마치 수용소에서 번호로 불리며 익명화되었던, 그러나 각자 하나의 우주였을 개인들의 실루엣처럼 느껴졌다.
에마뉘엘 레비나스 (Emmanuel Levinas)의 말이 떠올랐다. ‘타자의 얼굴’이 나를 윤리적 '인질'로 잡는다고 했다. 그 얼굴 없는 타자들이 나를 에워싸고 ‘살아남은 자의 책임’을 소리 없이, 그러나 뼈아프게 묻고 있었다.
'너는 지금 평온한가?‘, ’너는 왜 여기에 있는가?'
그 질문 앞에서 나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기둥과 기둥 사이 너머로 십자가 형상이 눈에 들어오자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춰섰다. 종교, 이념, 신념…. 머릿속으로 무언가 정리해 보려 했지만 그 모든 시도는 무의미했다. 늘 아이들에게 '왜'를 묻고 '생각'을 가르치려 했던 나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교육학적 사유니, 역사의 교훈이니 하는 이성적인 생각들은 단 한 톨도 끼어들 틈이 없었다.
소리 없는 비명, 그 잔혹한 실체(Fact)를 찾아서
2,711개의 돌덩이가 일제히 내지르는 '소리 없는 비명'에 온몸이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압도적인 비탄감과 참담함에 감정이 복잡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그 비명 같은 침묵 속에 가만히 서 있는 것뿐이었다.
나는 도망치듯 그 회색 숲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거리를 걷는 내내 내 안의 무언가가 여전히 그 미로 속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가슴이 너무 답답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인간이 어떻게 인간에게 이토록 잔인할 수 있었는지 확인해야 했다.
나는 감당하기 힘든 물음표를 가득 안고서 다음 목적지인 '테러의 지정학(Topography of Terror)'으로 무겁게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