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친한 대학 동창 S가 경주에서 펜션을 시작했다. 처음엔 작게 시작했던 펜션이었는데 공간에 대한 기획력도 좋고 운영을 잘해 사업이 점점 커졌다. 그러다 올해 초 2층짜리 오래된 한옥을 인수했고, 지붕(한옥은 지붕이 정말 비싸다!)과 골조만 남기고 개조를 했다. 친구는 한옥스테이 공간을 하갤처럼 그림이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공간에 어울리는 그림을 제안해 달라며 아트디렉터의 역할을 맡겼다. '그림의 종착지는 평범한 일상과 집'이라는 평소 하갤의 믿음대로 누군가의 집으로 그림을 보내는 일을 해오고 있었지만, 막상 타인의 집으로 직접 찾아가고 그림이 놓여질 공간까지 개입하는 경험은 드물다. 친구의 제안은 처음부터 그림이 있는 공간으로 기획된 과정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 있는 일이었고, 하갤을 벗어나 다른 공간을 기획하는 첫번째 경험이기도 했다. 나에겐 마치 '하우스갤러리 경주'를 만드는 것 같은 도전의식이 생겼다.
처음 계획에선 작품을 구매할 예산이 어느 정도 잡혀 있었다. 그런데 공사 과정에서 예기치못한 일들이 생겨나며 공사는 길어졌고 예산도 늘어났다. S는 그림을 살 여력이 없을 것 같다며 침울해했다. 무슨 걱정이란 말인가, 빌려줄 돈은 없지만 나에겐 빌려줄 그림이 많단 말이다! 하갤을 운영하며 소장품이 많이 쌓였지만 하갤은 늘 새로운 전시공간으로 쓰이다 보니 막상 소장품이 벽에 걸릴 일이 없어서 한쪽 방에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다. 작품은 벽에 걸려야 가장 빛이 나는데 창고에 쌓아두고 있는게 나로선 안타까운 일이기도 했다. 믿을만한 곳으로 가는 거라면 얼마든지 그림을 빌려줄 수 있다. 하물며 내 친구의 일인 것이다.
우리는 머리를 맞대 공간에 어울릴 그림을 골랐다. 한옥의 천장과 들보, 기둥을 최대한 노출한 공간이라 그 자체가 너무 아름답게 느껴졌지만, 생각보다 그림을 걸기는 어려운 공간이란 것을 깨달았다. 또 S는 아무리 작품이 좋아도, 유리없이 마띠에르가 도드라진(만지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는) 작품을 턱 하니 거는건 부담스럽다고 했다. 중요한 변수였다. 그 점도 고려해 액자 없이 마띠에르 뿜뿜한 그림을 제외하니 걸 수 있는 그림이 몇 점 남지 않았다. 여러 그림을 들었나 놨다 하며 한참을 고민했다.
소장품의 한계가 있어 결국 원화 외에도 에디션(판화)도 제작하게 되었다. 인스타그래머블한 색감도 필요할 것 같아 급하게 호주의 한승무 작가에게 도움을 청해 공간에 생기를 더해줄 아티스트프린트(AP)를 부탁했다.한승무 작가의 <Nolo & Pouf> 시리즈 넉점은 거실과 침실의 하얗고 넓은 벽에 두점씩 나란히 배치했다. 2년전 한 경매에서 구했던 데이비드 호크니의 1983년도 도쿄 전시의 빈티지 포스터는 1층 현관문을 열고 저멀리 벽의 전면에 걸었다. 서울옥션에서 구매했던 에든버러의 창밖 풍경을 담은 정경자의 사진은 이미 원목액자로 제작된 것이라 손을 더할게 하나도 없었다. 다만 작품이 걸리는 위치에 빛이 많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아 친구와 의논 끝에 블라인드로 적당히 빛을 차단했다. 프랑스 일러스트레이터 레아 모쁘띠(Léa Maupetit)의 <검은 고양이> 오픈에디션 사인본은 파리지엔블루 대표님을 통해 어렵게 구했는데 동네의 길고양이 집사이기도 한 S에게 딱맞춤이었다. 그렇게 해서 시크한 검은 고양이 한마리도 한옥 스테이안에 자리잡았다. 야요이 쿠사마의 <노란 호박> 오브제 굿즈는 매트한 블랙으로 액자를 만들어 노랑을 더 강조했고 한옥 창가 커피를 마시는 공간에 걸었다.
공간의 구석구석에 스며들듯 그림이 걸렸다. 그럼에도 뭔가 한옥의 시그니처 오리저널 그림 한 점이 더해지면 좋을 것 같아, 고민하다 이고운 작가에게 부엉이 그림 한 점을 의뢰했다. 부엉이는 복을 부르는 존재로 대중적 사랑을 받고 있기도 하고, 스테이에 머무를 사람들의 밤을 지켜준다는 의미도 있었다. 친구의 말로는 경주는 일년 내내 아름답지만 겹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4월이 가장 아름답다고 했다. 그러니 겹벚꽃이 피는 4월을 배경으로 하고, 그림이 걸릴 한옥의 포인트컬러인 노란 색감도 들어가면 좋겠다는 의도를 전했다. 이고운 작가는 틈틈히 밤의 시간을 쪼개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고맙게도 벚꽃이 한창일 때, 막 물감이 마른 그림을 보내주었다. 몽글몽글 벚꽃이 가득한 나무에 앉은 부엉이의 볼에는 분홍빛 홍조도 띄고 있었다. 따듯한 그림이 따듯하게 공간을 완성했다. 그림이 있는 한옥스테이 하우스갤러리 경주가 하우스갤러리2303보다 더 근사하게 변모한 것 같아 뿌듯했다. 이 일을 하는 동안 궁극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이 그림과 사람, 나아가서 공간을 연결짓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