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언덕 Dec 11. 2024

보라, 이 부엌의 신(God)을

결국 빛바랜 신문 속 인물을 실존 인물로 만나게 되었다. DM을 보내 때마침 전시 중인 하갤의 7회 전시 <김정아-보푸라기전>에 작가를 초청했다. 그리고 기나긴 작가와의 대화를 통해 그림책 이야기, 인생에 관한 이야기까지 나눌 수 있었다.  


윤강미 작가는 1965년 경북 경산에서 태어나 영남대와 동 대학원 회화과를 거쳐 대구 화단에서 활동했다. 젊은 날의 작가는 내면의 풍경이 깃든 현대인의 일상적 삶의 모습과 중국 고대신화 형상에 일상 사물들을 병치시켜 새롭게 구성하는 등의 그림을 그렸다. 작가로서의 길은 확고하게 그의 가슴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소설가와 결혼한 이유가, 그러면 자신도 계속 작가로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했다.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전투적인 기세로 육아와 작업, 생활형 경제활동을 병행했고, 삶과 예술의 파고 속에서도 작업을 지속할 수 있어 행복했다. 


회화 작가였던 그가 그림책 작가로 전향한 이유는 아이를 키우며 접하게 된 그림책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회화는 한없이 펼쳐나가는 작업인데 반해 그림책은 한 권으로 완결시켜야 한다는 점이 어렵기도 했지만, 한 권의 책으로 축약된 작가의 그림과 이야기가 '전시'의 방식보다 더 많은 이들에게 가닿을 수 있다는 책의 속성이 큰 매력이었다. 가족들을 돌보며 틈틈이 여러 워크숍에서 그림책을 공부하고 자신의 그림책을 준비했다. 그림책을 준비한 무려 14년간의 흔적이 여러 더미북(그림책의 초고)과 수백 장의 그림으로 남았다. 작가가 첫 그림책 『나무가 자라는 빌딩』(창비, 2019)을 출간했을 때는 50대 중반의 나이에 이르러서였다. 긴 잠에서 깨어난 매미처럼 늦은 데뷔였으나 또 화려한 데뷔이기도 했다. 2018년 현대어린이책미술관의 「제1회 언-프린티드 아이디어(Un-printed Ideas)」전시에서 관람객 투표를 통해 선정되고 출간된 이 그림책은 이듬해 볼로냐국제아동도서전에서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겼고 2024년 현재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대만, 터키, 브라질로 뻗어나갔다. 이후 출간한 『달빛 조각』(창비, 2021), 『미나의 작은 새』(길벗어린이, 2023)도 해외 출간과 해외 수상, 국내외 전시와 도서관 프로그램 등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작가의 삶 자체가 나에겐 감동으로 다가왔다. 끝없이 방황하고 고민하며 하갤을 운영하고 있는 40대 중반의 나에게 한발 더 내딛고 헤맬 용기를 주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경력단절을 극복했느냐는 나의 우문에 작가는 한번도 단절된 삶을 산 적이 없다는 현답을 내 놓았다. 그 이야기에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대화는 어느새 고민 상담으로 변했다. 어떻게 아이를 키워야 하느냐, 엄마인 나와 사회적 인간인 나 사이 어떻게 삶의 균형을 잡아햐 하느냐 물었다. 작가는 아이만 바라보고 있지 말고 엄마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좋아하는 일에 한 발씩 다가가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그 자체가 교육이라고 했다. 동네 엄마들처럼 아이공부에나 신경쓸까, 이런 나의 일도 일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8할을 지배하고 있던 나에겐 어떤 빛 줄기같은 느낌이 들었다. 


예술과 삶이 완벽히 조응하는 이런 작가라니! 이 작가의 삶 자체를 전시로 구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작가는 책 작업에 집중하고 싶다며 전시를 고사했다. 겨우 삼고초려 끝에 10회 그룹 전시 <삶으로 들어간 예술>(2023.12.4-2024.1.19)에 이르러서야 섭외할 수 있었다. 섭외는 어려웠으나 전시가 결정된 후에는 윤강미 작가는 정말이지 열과 성을 다해 전시에 참여해주었고 언제나 기획자인 나를 배려하고 격려해주어 큰 힘을 얻었다. 


5인의 그룹전 중 윤강미 작가의 전시 방향은 과거와 현재가 분리된게 아니라 이어지고 있다, 삶은 예술을 담고 있고 예술은 삶을 담고 있다는 메시지였다. 따라서 현재의 그림책 작업과 함께 빛바랜 신문기사에서 보았던 30년 전 작가의 자화상, 그 중에서도 나의 뇌리에 강렬하게 각인된 <부엌의 신(The God of Kitchen)>을 함께 담아야만 했다. 작가에게 그 작품들을 청했지만 예전의 회화 그림의 소재와 상태가 불분명하다고 했다. 몇번의 이사를 하면서 수많은 그림들을 모두 이고지고 살수 없어 일부는 대구에 있는 시댁과 친정에 맡기고 또 일부는 직접 작품을 불태웠다고 했다. 후회되고 속상한 작가의 기억을 상기시켜야 하는 나 역시 안타깝고 속상했다. 이 참에 대구에 가서 작품을 찾아보겠다고 한 작가에게서 다행히 기쁜 소식이 왔다. 그리고 시댁 창고에서 찾은 그림을 개봉한 사진을 보내왔는데, 나는 깜짝 놀라 소름이 돋았다. 너무나 오랜만에 세상의 빛을 보느라 마치 어제 그려진 것처럼 선명하게, ‘부엌의 신’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삶에 예술을 뺏기지도, 예술에 삶을 희생시키지도 않겠다는 결연한 눈빛의 30년 전 30세의 작가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작가의 모습과 기개는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윤강미, <부엌의 신(The God of Kitchen)>, 117x91cm, 캔버스에 아크릴, 1995, 작가 소장

이 그림은 전시 기간 내내, 나 뿐만 아니라 수많은 관객들에게 감동과 공감을 이끌어냈다. 여러 에피소드가 생겨난 그림이기도 한데 그 중 남편과의 일화를 하나 소개한다. 

극적으로 대구에서 '발굴'된 이 그림은, 12월 전시를 한참 앞두고 10월 말 일찌감치 하갤에 도착했다. 나는 혹여라도 전시의 스포일러가 될까봐 안방으로 들고 들어왔다. 다음 전시 준비를 위해 휑해진 벽에 이 그림을 척 하고 걸었더니 작품의 아우라가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나는 흐뭇하게 그림을 바라보았다. 다음날 아침, 부스스한 모습으로 깬 남편이 이 그림을 꼭 여기 걸어야만 하느냐며, 자다 깨서 눈이 마주쳤는데 너무 무섭다고 했다. 매서운 눈초리, 칼을 든 부엌의 신이 '무언가(something)'를 썰고 있으니 여러모로 섬뜩했나 보다. 

"여보, 미안. 이 작품은 오픈 전까진 꼭 숨기고 싶어. 알다시피 작품 보관할 장소가 없잖아. 곧 작품에 익숙해질거에요."

한달이 지나고, 12월 4일 전시 오픈을 앞두고 작품 배치가 시작되었다. 이 작품은 맥락 상 부엌 옆 공간에 걸리는게 좋을 것 같았다. 게다가 전시장에 막 들어와서는 90도로 꺾긴 숨겨진 벽이라 그림과 대면하는 순간에 극적인 긴장감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남편이 반대했다. 

"안돼! 거긴 너무 구석이잖아. 잘 안 보인다구. 이 작품은 안방 벽 중심에 턱 하니 걸어서 집중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전시의 핵심 작품이란 말야" 

어느새 남편도 그 그림에 빠져있었다. 의견은 고맙지만, 설치는 내가 할께.

전시를 오픈하는 날, 눈이 펑펑 내렸다. 모처럼 휴가를 내고 바리스타를 자처한 남편에게 전철역에 가서 작가님들을 차로 모셔오라고 부탁했다.  

"두 분을 태워오라는 거지? 김정아 작가님은 알지만, 윤강미 작가님은 모르는데 어떻게 태우지?"

남편은 윤강미 작가를 어떻게 알아보고 태울지 걱정하며 집을 나섰다. 그리고 잠시 후 집에 돌아온 남편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운전해서 가는데, 멀리서 윤강미 작가님을 딱 알아봤어! 그래서 바로 차를 세웠지" 

이제 저 '부엌의 신'은 환한 얼굴로 웃으며 아이들과 책 수업을 하는 '그림책 작가'로 살고 있다. 그러나 끊임없이 자신의 길을 향해 걷고 있는 저 결연한 표정, 단단한 눈매는 지금도 여전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