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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힐링스팟 Nov 23. 2021

당신의 생애 첫 기억은 무엇인가요?

나를 심리학도의 길로 들어서게 했던 질문

대학교 2학년 당시 <기독교와 상담> 수업을 듣던 중 교수님께서 질문하셨다.


여러분의 생애 첫 기억은 무엇인가요? 그 기억을 떠올려 보세요


학생들은 각자의 기억을 떠 올리며 답변하였고, 나 역시 내 차례가 되었을 때 교수님께 답변 겸 질문을 하였다.


교수님, 제 기억은 음, 뭐라고 해야 할까요? 왜곡이 좀 되어 있는 것 같은데, 이럴 수도 있는 건가요? 제 초기 기억은 넓은 들판에 소 한 마리가 있고 그 소 앞에 포대기로 감싸 있는 갓난아기가 울고 있어요. 그 멀리로 아빠가 서 있는데 그 모습을 마치 제삼자가 되어 바라보고 있는 것이 제 초기 기억이에요. 마치 갓난아기인 저를 제가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랄까? 이런 것도 초기 기억이 될 수 있나요?
곰손으로 대략 내 생애 첫 기억을 그려보자면 저런 이미지였다.


그래도 전공 수업으로 듣는 상담 수업인데, 대단한 분석이라도 해 주시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있는 그대로의 첫 기억을 술술 풀어 말씀드렸고 초롱한 눈망울로 교수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나에게 묵묵히 듣던 교수님이 답변하셨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아프네요


대단한 분석을 바랐건만 교수님께서는 저 한 문장을 눈물을 글썽이시며 하셨다. 그 순간 나 역시 울컥하였고, 20여 명이 함께 듣는 수업 시간에 나도 모르게 눈물을 훔쳤던 생각이 났다. 그리고 그때 어렴풋이 내가 상담사의 길을 걷게 되겠구나를 느꼈던 순간이었다.




당신의 인생 처음의 기억은 무엇인가요?


상담을 받거나 심리학 수업을 받으면 저 질문을 종종 받게 된다. 인생 초기의 기억과 그 기억에 담겨 있는 감정은 한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프레임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나는 조선시대도 아닌 20세기 후반 언저리에 태어났건만 "딸로 태어난 죄인"이라는 생각이 무의식 어딘가에 남아있었던 것 같다. 이미 딸이 셋이나 있는 집안에서 연년생으로 갑자기 생긴 아기를 주변 사람들 모두는 아들이라고 생각했고, 엄마 역시 막달까지 철썩 같이 아들이라 믿고 낳았는데, 딸이 태어나서 쳐다보지도 않고 엉엉 우셨다는 이야기를 자라면서 종종 들었다. 이름도 아들로 지어놨었던 터라 (아마 내가 사내아이였다면 내 이름은 가베드로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갑자기 태어난 딸의 이름을 교회 교사 선생님들께 돌아가면서 지어보라 했고, 그중에 마음에 들었던 이름 하나로 지으셨다 했다. (감사하게도 센스 있는 작명에 나는 지금 내 이름이 대단히 좋다.)


그렇게 그다지 축복받지 못한 채 딸 많은 집의 막내딸로 인생을 시작한다.


인간 심리의 기본 욕구, 인정의 욕구


그러다 보니 나에게는 부모님께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남들보다 좀 더 크게 자리 잡았던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난 부모님께 가끔 "이거 봐, 아빠 나 낳길 잘했죠?"라는 소리를 종종 한다. 친정 집의 세탁기, 냉장고, TV, 밥솥, 전자레인지, 식탁 등의 살림을 직장 생활하며 지금껏 시시각각 바꿔드리며 꼭 생색을 낸다. 나 낳길 잘한 거라고. 축복받은 탄생까지는 아니어도 후회 없는 선택이 되셨기를 나의 중요한 타인이었던 부모님으로부터 받고 싶었던 것 같다.


나의 인정에 대한 욕구는 생각보다 큰 그릇이었기에 부모님으로부터 받는 인정만으로는 늘 갈증에 시달렸다. 높은 신앙의 기준이 있었던 가족 분위기에서 우리 집 날라리로 컸던 나로서는 집에서 인정받기는 더 어렵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나는 외부에서 더 많은 인정이 필요로 했고, 그 욕구는 부단히도 나를 움직이게 했다.


임원을 선출직으로 뽑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열심히 반장선거에 나갔다. 3학년 1학기 첫 반장선거 때는 나 혼자 내 이름을 써낸 1표를 받았지만 그것이 또 밑거름이 되어 고등학교 때까지 임원직을 한 차례도 놓치지 않고 수행해 왔다.


앞선 매거진에 쓴 글과 같이 시어머니와 살면서는 시어머니께 인정받고 싶어 상다리 부러져라 첫 생신상을 차리기도 했고, 회사에 입사해서는 만삭에 야근과 주말출근도 마다하지 않고 그렇게 내 달렸다. "역시, 가팀장"하는 썸즈 업 하나 만으로도 대단한 보상을 받은 것만 같았다.


적절한 열등감은 삶을 움직이게 하는 연료가 된다.


사람의 행동 변화는 '인식(awareness)'에서 시작된다. 내가 딸 많은 집에 막내딸로 그다지 축복받으면서 태어나지 못한 것은 바꿀 수 없는 과거이다. 그리고 그 여건에서 태어나 나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좀 크게 있다는 것을 인식하였을 때, 그 사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을 그 자체를 내가 인식하고, 성인이 된 나 자신이 어린 시절 나를 보듬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심리학을 전공하고 먹고살며, 지금도 부모님께 감사한 점은 그래도 내가 극복해야 하는 열등감을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남겨주셨다는 것이다. 비록 축복받은 탄생은 아니었고, 나의 성별이 바뀌지도 않았지만 부모님께서는 내가 "일하고 사랑할 수 있는" 건강한 사람으로 커갈 수 있도록 사랑과 관심을 주셨구나 싶다. 비록 내 욕구에 가득 찰 정도는 아니었지만 정당히 어느 정도 채워주신 관심과 사랑 덕분에 나머지는 내가 채우면서 살 정도는 되었으니 말이다. 아마도 이 글을 아빠가 읽으신다면 대단히 섭섭하시리라. 본인이 준 사랑이 넘치지 않았다는 사실이 내심 아쉬워하실 것 같다.




아무튼 그렇게 나는 상담이라는 것이 보통의 사람을 보다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준 점이 대단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대학을 졸업하며 상담사의 길을 가야지 싶었지만 당시에도 먹고살아야 하는 이슈로 대학원 학비를 벌기 위해 취업의 길로 들어섰고 학비를 벌고 난 2년 뒤, 대학원을 입학하게 된다.


(심리 대학원 준비기와 대학원 수련 기는 이어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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