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운 똥밭이라도, 마땅히 굴러봤으면 해요
한참을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간신히 집 앞에 도착하자 K 형의 모습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행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 30분밖에 안 기다렸다. K 형의 장난기 어린 대답에 다시금 고개를 푹 숙였다. 야, 땀 봐라. 천천히 오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뭐 사갈까. 급하게 자전거 자물쇠를 잠근 후, 곧장 K 형과 집 근처 편의점으로 향했다. 요리를 해주겠다는 나의 호의를 기어코 거절하고, K 형이 집어 든 건 몇몇 냉동식품과 마른안주였다. 그런 거 조미료 많이 들어가서 몸에 안 좋은데요. 술 마시면서 무슨 몸 걱정하노. 아직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이제 막 2차를 끝내고 편의점에 들어와 티격대격 하는 느낌이었다. 몇몇 안주가 담겨있던 바구니에는 추가로 소주와 맥주가 각각 두 병 담겼다. 처음에 소맥으로 먹다 나중에 소주를 먹는, 마치 오래된 전통처럼 익숙한 순서를 예고했다.
허구한 날 K 형과 부산 곳곳을 돌아다니며 함께 술잔을 기울였지만, 최근에는 집에서 먹는 일이 잦아졌다. 늘 홀로 있던 자취방에 모처럼 맞이하는 손님이 거의 매주 만나 술을 마시는 친한 형이라는 사실이 왠지 모르게 씁쓸했지만, 자취방에서 먹는 술은 나름 특별했고 여러모로 괜찮았다. 첫 번째, 우선 가격이 저렴했다. 마트에서 이것저것 장을 보고 소주와 맥주를 많이 사도 술집에서 나오는 비용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두 번째, 자리를 옮길 필요가 없었다. 술과 안주가 떨어지면 다시 집 근처 편의점이나 마트에 잠깐 들르면 그만이었다. 세 번째, 실컷 마시다가 피곤하면 곧장 잠들 수 있었다. 택시를 잡을 필요도, 늦은 시간에 집에 들어가 가족들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 이 세 가지 장점은 한편으론 단점이기도 했다. 가격은 쌌지만 그만큼 안주의 맛이 떨어졌다. 심지어 술 맛이 아쉬울 때도 종종 있었다. 자리를 옮길 필요는 없었지만 분위기 전환도 되지 않아 1차, 2차, 3차 새로움을 더해가는 맛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곧장 잠들 수 있어 좋았지만, 이 편안함을 한 번 맛보고 나면 집에서 먹는 일이 잦아졌다. 이러한 이유로, 오늘도 나와 K 형 사이에는 조촐한 술상이 펼쳐졌다.
이미 저녁 약속이 있는 상태에서 조금 무리를 하면서까지 술자리를 가지게 된 건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대학원 박사 과정을 착실하게 밟아나가던 K 형에게 갑자기 취업 제안이 온 것이다. 박사 학위를 따더라도 미래를 먹먹했고, K 형이 꿈꾸는 대학교수가 될 가능성은 더욱 먹먹했다. 마땅한 돈벌이는 없고, 나이는 먹어가고, 이미 사회에 진출한 또래들과 격차가 점점 벌어지는 상황. 그런 K 형에게 취업 제안은 달콤하게 다가왔다. 그런 제안은 이전에도 몇 번 있었지만, K 형은 그럴 때마다 유혹을 뿌리치며 학업에 매진했다. 그렇게 대학원에 끈질기게 붙어 있은 지 무려 5년이 흘렀다. 흔들리는 일이 있을 때마다 간혹 술잔을 기울였고, 그럴 때마다 나는 K 형의 꿈을 응원했다. 이미 선택한 길이니, 힘들긴 하겠지만 같이 열심히 버텨보자며 K 형의 빈 잔을 채워주곤 했다. 다만 이번 제안은 이전과 달리 묵직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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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황을 나누며 두세 잔을 먹다, K 형은 본격적으로 취업 제안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어지간한 제안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는데, 이번 기회는 사뭇 다르다고 했다. 이름 있는 회사였고, K 형이 대학원에서 배운 업무를 활용할 수 있는 분야였다. 무엇보다 연봉이 높았고, 계약직이었지만 정규직 전환의 기회가 있었다. 박사 과정은 논문만 준비하면 되었기에, 직장에 다니며 틈틈이 쓸 수 있을 거라 덧붙였다. 이미 답을 내린 것 같은데 뭘 물어보려고 온 걸까 싶었지만, 저녁 9시에 친하게 지내는 동생을 찾아와 무려 30분을 집 앞에서 기다리며 술자리를 가진다는 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자신이 내린 결정에 확신을 더하기 위함일까, 꿈을 포기하지 말라는 대답을 들으며 커다란 자극을 받고 싶은 걸까. 진로 문제, 먹고사는 문제에 관해서는 항상 조심스러웠고, 가장 아끼는 사람 중 한 명이었기에 더욱 조심스러웠다. 내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면서 상대방의 꿈에 대해, 진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모습이 우스웠다. 그럼에도 늦은 시간에 먼 길을 찾아온 사람에게 형식적인 이야기만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이윽고 타협점을 찾았다. 그냥 내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주기로 결정을 내렸고, 이내 입을 열었다. 행님. 이건 그냥 제 이야기인데요. 행님도 아시다시피 저 취업하기 참 싫어했잖아요? 왠지 현실과 타협하는 것 같고, 꿈과 멀어지는 거 같고, 오래 못 버틸 거 같고, 직장생활이 저랑 안 맞을 거 같고, 월급 따박따박 받다 보면 거기에 적응해서 머무를 거 같고, 막 그랬거든요. 그런데 이게 다 환상이더라고요. 그래도 직장생활을 1년 넘게 해보니,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부분도 있고, 생각지도 못한 문제로 머리 아프기도 해요. 좋든 싫든 먹고살려면 돈을 벌어야 하고, 안정적으로 돈을 벌려면 어쨌든 어느 회사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 속에서도 누군가는 머물고, 누군가는 치열하게 살더라고요.
K 형은 내 이야기에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론 자신이 놓여 있는 특수한 상황을 얘기했다. 그냥 하고 싶은 일을 하다가 먹고사는 게 어려워서 회사에 들어가는 것과, 교수의 꿈을 가지고 대학원에 다니다 학위를 받기 전 회사에 들어가는 건 다르지 않냐고 했다. K 형의 말에 잠시 숨을 고르고, 잔을 기울였다. 크- 오늘따라 왜 이렇게 쓰노. 테이블에는 몇몇 안주가 있었지만, 좀처럼 손이 가지 않았다. 아, 행님. 이렇게 진지한 이야기를 할 땐, 안주 맛있는 곳에서 한잔해야 하는데요. 지금 나갈까? 시계를 보니 11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 시간에 나가면 진짜 새벽 2시, 3시까지 마셔야 한다. 니 내일 출근 아니가. K 형의 말에 결국 수긍하며, 비어 있는 빈 잔에 소주를 채웠다. 퇴근하고 7시쯤 만나서 1차, 2차, 3차 술집을 옮겨가며 먹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세상일이 그렇게 딱딱 좋게 맞아 떨어지는 경우는 잘 없었다. 취업을 하느냐 마느냐 아무리 고민을 해도, 딱 맞는 답을 찾기 어려운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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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안주를 뒤적거리다, 아까 편의점에서 사 온 인스턴트 우동을 집었다. 행님, 이거 그냥 먹으면 별롭니다. 잠시만요. 부엌으로 가서, 가스레인지 위에 큰 팬을 하나 올렸다. 불을 켜고, 우선 우동 국물을 부었다. 간을 맞추기 위해 물을 조금 더 부었다. 국물이 끓을 때까지 기다리며 몇몇 재료를 준비했다. 양파를 먹기 좋게 반달형으로 썰었고, 냉장고에 조금 남아 있던 양배추도 적당한 크기로 다듬었다. 냉동실에서 다진 마늘과 미리 썰어놓은 땡초도 한 줌도 꺼냈다. 이윽고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오자 면을 푹 담갔고, 준비한 야채를 곧장 하나둘 넣었다. 여기에 굴소스와 국간장을 각각 한 숟가락씩 더 넣었다. 그렇게 인스턴트 우동은 먹음직스러운 술안주로 변신했다. 와, 니 진짜 요리 잘하네. 뚝딱 만든 우동을 안주 삼아, 다시금 술잔을 기울였다. 집에서 마시지만, 자체적으로 준비한 2차였다.
마늘과 땡초를 넣어서 그런지 국물이 무척 얼큰했다. 조금 전까지 올라오던 취기가 잠시 기세를 누그러뜨린 듯했다. 그래서 우짜면 좋겠노. 다시금 주제는 K 형의 취업으로 돌아왔다. 연거푸 잔을 기울였다. 다시금 분위기가 무거워졌고, 얼큰한 국물에 밀리던 취기가 다시금 올라오고 있었다. 자기검열과 조심스러움, 배려가 사라진 상태. 맨 정신으로 하기 힘든 이야기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쏟아붓기에 딱 좋은 상태였다. 행님, 있잖아요. 남들은 저보고 하고 싶은 일로 돈 번다고, 멋있는 일 한다고 막 부러워하잖아요? 그런데 막상 회사에서 하는 일은 그리 특별할 게 없는 것들이에요. 여기저기 메일 보내고, 서류 작성하고, 택배 보내고, 짐 나르고. 그러다 보면 하루가 금방 가요. 그러다 회사 행사가 있는 날이면 맨날 여기저기 가서 떡이나 과자, 김밥 사 오고, 자리 세팅하고, 행사 끝나면 그것들 다 정리하고, 설거지하고, 막 그래요. 물론 저희 회사 대표님은 더 심해요. 어디서 돈 구해오나 맨날 걱정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일 구해오고, 아쉬운 소리도 해야 하고. 이게 현실이에요. 그런데 이런 과정이 없으면 멋있어 보이는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못해요. 그 정신없고 바쁜 시간 속에서 틈틈이 책을 기획해서 만드는 거예요.
왜 자꾸 니 힘든 이야기만 하는데. K 형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게,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들이라고요. 아무리 연봉 많이 준다 하고, 하고 싶은 일과 가깝다고 해도, 정작 들어가면 귀찮고 짜증 나고 성가신 일로 가득할 거예요. 저는 행님이 그걸 마땅히 겪었으면 좋겠어요. 거기서 돈을 많이 벌라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의미를 찾으란 것도 아니에요. 어느 회사를 가든 직장생활은 힘들 수밖에 없잖아요. 꼭 회사 안에서 뿐만 아니라 일을 하다 보면 업무 관련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여기저기 뒤치다꺼리하는 일이 참 많아요. 더럽고 치졸한 일도 정말 많고요. 그야말로 똥밭이에요, 똥밭. 근데요, 행님이 그런 똥밭을 마음껏 굴러봤으면 해요. 그러고 나서 계속 직장생활을 하든지, 다시 대학원으로 돌아가서 공부하든지 결정해도 그리 늦지 않을 거 같아요. K 형의 빈 잔을 채웠다.
각종 재료를 넣어 먹음직스럽게 만들었던 우동은 어느새 차갑게 식어 있었다. 어느새 시곗바늘은 하루 할당량을 채우며, 새로운 하루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좀처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술자리는 서서히 식어갔던 우동 국물처럼 점점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K 형이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지 궁금했다. 취업을 결정하며 냉혹하고 험난한 사회에서 발을 디디든, 대학원에 남아 열악한 환경을 꾸역꾸역 버티며 꿈을 좇든, K 형은 어느 쪽이든 충분히 잘해낼 거라 믿었다. 무엇보다 어느 선택을 하든 험난한 지점이 있을 테고, 그때마다 친한 동생과 이렇게 술 한 잔 기울이지 않을까 싶었다. 동생 입장에선 어느 쪽이든 환영이었다. 우리에게 어떤 미래가 펼쳐질까 문득 궁금해졌지만, 그런 복잡한 생각은 술잔과 함께 떠나보냈다. 내일도 또 출근해야죠. 행님, 막잔 할까요? 밤은 점점 깊어지고 있었고, 그 밤을 술잔에 기대어 만끽하는 우리의 청춘도 한없이 깊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