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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오 Mar 16. 2020

이제 서른이 코앞인데, 어쩌냐

좋아서 하는 건지 물어보면 밑도 끝도 없지만, 어쨌든 해야 하는 일이잖아

   버너 위에 닭도리탕이 올라가자 이미 채워놓은 잔을 기울였다. 첫 잔을 늘 그렇듯 소주와 맥주를 적절히 섞어 목 넘김이 자연스러운 소맥이었다. 크- 이 맛이지. 며칠 만에 먹는 술인가 싶어 지난 일주일을 돌이켜보니, 어제 본가에서 저녁을 먹으며 아버지와 반주를 기울인 게 생각났다. 그 하루 전에는 또 모처럼 만난 동네 친구들과의 술자리. 전혀 오랜만이 아니었지만, 첫 잔이 주는 짜릿함은 메마른 사막을 헤매다 오아시스를 찾았을 때의 그것과 비슷했다. 물론 사막에 가 본 적은 없지만, 술 없이 하루하루 버텨야 하는 퍽퍽한 일상이 내게는 곧 사막이요, 몇 년 만에 만난 친구와 모처럼 술잔을 기울이는 이곳이 곧 오아시스와 다름없었다.


   야, 거의 2년 만에 아니냐. C의 빈 잔을 내 앞으로 가져와 소주와 맥주를 섞었다. 황금비율로 만들려 했지만, 실수로 소주를 많이 넣어버렸다. 뭐, 어때. 내가 마실 것도 아닌데. C에게 다시금 잔을 내밀었다. 어차피 술 잘 마시는 놈이라 걱정할 건 없었다. 너는 그사이에 너는 책도 내고 강연도 하러 다니고, 성공했네. C가 특유의 과장된 말투로 반쯤은 놀리는 듯 대답했다. 니가 내보다 글 잘 쓰는데, 니도 얼른 책 내야지. 요즘은 글 안 쓰나. 뭐, 바쁘다 보니까 못 쓰지. 서로의 근황을 주고받는 사이 버너 위에 올려놓은 닭도리탕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국자로 붉은빛의 진한 국물을 떠서 팬 위에 수북이 쌓인 고기와 야채를 천천히 적셨다.


   확실히 출판사 일하니까 글쓰기가 많이 늘었네. 다른 사람 관찰한 글이 이렇게 재미있게 읽히는지도 몰랐고. 빈말은 좀처럼 하지 않는 C의 칭찬이 조금은 민망하게 다가왔다. 너 이야기가 인기 제법 많았다. <젊은 날의 초상>, 제목 멋지지 않냐. 지난여름 출간된 첫 단행본에 C와 술자리에서 나눴던 이야기를 풀어낸 글이었다. 사회를 바꾸자며 소주잔을 기울이던 우리가 당장 먹고살기 급급한 직장인이 되며 현실과 타협하고 적응해버리는 과정에서 느낀 아쉬움과 쓸쓸함을 담은 내용이었다. 안 그래도 읽어봤는데, 야, 내가 주식한다는 걸 무슨 만천하에 공개해버렸냐. 안 그래도 그때 산 주식 망해서 씁쓸했는데. 뜻밖의 항의에 C의 빈 잔을 다시금 소주와 맥주로 채워줬다. 그래서 사람들이 더 공감하는 거지. 보통 망하잖아.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닭도리탕은 먹음직스러운 자태와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사장님, 이거 먹어도 되나요? 


   고기가 벌건 양념에 적절히 배여 맛을 더해가는 동안, C와의 술자리도 서서히 익어가고 있었다. 어느새 직장인 4년 차가 된 C의 서울살이에 대해 듣기도 하고, 연락하고 지내는 지인들의 소식을 나누었다. 연애 이야기도 나누려고 했지만, 채 몇 분도 가지 않았다. 나이 먹은 남자 둘이 칙칙하게 이게 뭔가 싶었다. 그러다 생각보다 높은 C의 연봉에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 야, 너 진짜 기득권 다 됐네. 그렇게 많이 받는다고? 뭐가 기득권이냐, 월급쟁이지. 서울 살아서 돈 나갈 데도 많고, 차 사고 집 사고 하려면 돈 열심히 불려야 한다. 또 주식하게? 키득거리며 닭다리 하나를 집어 들었다. 비주얼에 비해 맛이 조금 아쉬웠지만, 가격이 저렴한 대학가 앞 술집은 거기서 거기였고, 술안주로 그리 나쁘지 않았다. 다리 하나를 먹어 치운 후, 남은 소맥을 다 비웠다. 맥주 하나 더 시킬까. 아니, 이제 소주 먹자. 곧장 소주잔을 꺼내 들었다. 


   야, 근데 진짜 궁금한 게 하나 있다. 소맥으로 윤활유를 붓고 본격적으로 소주를 마시자 술기운이 금방 올라오기 시작했다. 옛날 포장마차에서 그랬던 것처럼 정치 얘기와 사회 문제 등에 대해 토론을 하다 말고, 얼큰하게 올라온 취기를 빌려 화제를 돌렸다. 책에도 그렇게 쓰긴 했는데, 사실 의문이 해소 안 돼서. 니 진짜 그 직장에서 계속 있을 거가? 명예를 얻든 돈을 벌든 뭔가 도전하거나 그럴 생각은 완전 사라진 거가. C가 서울에 있는 공기업에 취업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 지난 몇 년간 계속 품었던 의문이었다. 내가 뜸을 들인 것에 비해 C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나도 현실에 안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여기저기 알아봤는데, 지금 회사의 업무 강도로, 지금 받는 만큼 월급 주는 곳이 없더라고. 이직을 생각해봤다는 C의 말에 깜짝 놀라고, 현실적인 조건을 따지고 금방 결론을 내린 결단력에 다시 한 번 더 놀랐다. 서울에서 혼자 지내려면 돈을 벌어야지. 너무나도 당연한 말은 오히려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저번에 회사에서 큰 세미나에 참석했거든. 원래 일반 사원은 발표 못 하는데, 그때 어떻게 어떻게 방법을 찾아서 내가 무대에 올라가서 발표 했다. 좋게 보면 신입이 열심히 하는 모습이고, 안 좋게 보면 출세에 눈이 멀어서 선배들 제치고 나댄 거지. C의 무용담 아닌 무용담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래, 그게 너 답지. 니는 누가 시키는 것만 하면서 조용히 직장 다닐 놈은 아니잖아. 키득거리며 C 앞에 놓인 빈 잔을 채웠다. C가 평소 버릇처럼 혼자 홀짝 마시려고 하기에, 얼른 잔을 내밀었다. 잔의 부딪힘이 유난히도 크게 울려 퍼졌다. 나도 나름의 욕망이나 야망이 있지. 해보고 싶은 것도 많고. 그냥 우리 고등학교 때 수능 공부한 것처럼, 대학 때 취업 준비한 것처럼 직장생활도 그렇게 하고 있는 거지, 뭐. 좋아서 하는 건지 스스로 물어보면 밑도 끝도 없지만, 어쨌든 해야 하는 일이잖아. 그래야 나중에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힘이나 조건 등이 만들어지는 거고. 이모- 여기 소주 한 병 더 주세요. 대선이요. 아, 그리고 샐러드 좀 더 주실 수 있나요? 문득 앞에 사람을 두고도 술을 홀로 홀짝홀짝 마시는 C의 버릇이 떠올랐다. 그래, 뭐. 급할 거 뭐 있겠냐. 목소리에 절로 한숨이 섞여 나왔다. 남들이 건배를 하든 말든, 오늘만 살고 죽을 것처럼 술을 퍼붓든, 자기만의 속도로 마시면 되지 않겠나. 기분 좋아지려고 마시는데, 괜히 먹다가 체하면 안 된다이가.


   닭도리탕이 잔뜩 졸여져 있었다. 여기 육수도 더 주려나. 글쎄, 물어볼까. 냉장고에 오래 있었는지 소주병의 냉기가 손바닥에 그대로 전해졌다. 뚜껑을 따자 경쾌한 소리가 났고, 이를 출발 신호 삼아 다시금 소주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래, 뭐. 어차피 우리가 찍는 발자국 하나하나가 모두 도착점이 아니라 과정인데. 지금 멋이 있어 보이는 일 한다고 성공한 것도 아니고, 당장은 답답해 보여도 실은 큰 그림 그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거니까. 마음속에서 맴도는 말을 차마 내뱉진 못했다. 실은 그렇게 생각 안 하고 있으면서, 그럴 듯하게 포장하는 게 썩 내키지 않았다. 그래도 맞는 건 맞는 것이었다. 내가 인정하고 있지 않을 뿐. 이 당연하고도 당연한 이야기를 오늘 다시금 깨닫는 걸 보니, 아직도 학생 티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서른이 코앞인데, 어쩌냐. 홀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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