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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오 Mar 23. 2020

개인의 문제인가, 시스템의 문제인가

역시나 싸움 구경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다

   그러니까 실력도 없으면서 인맥으로 좋은 자리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거 아닙니까. 얼큰하게 올라오는 취기만큼이나, 평소 조용조용한 A 작가님의 목소리도 얼큰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한 시. 가벼운 마음으로 참석한 술자리가 이렇게 길어질 줄이야. 얼른 집에 가고 싶었지만 조금 전 3차로 들어온 이곳은 24시간 영업이었으며, 여기에 온다는 건 최소 새벽 두 시까지 술을 마실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누군가 정한 건 아니었다. 그냥, 내 앞에 앉아 있는 두 작가님과 자주 술자리를 가지다 보면 자연스레 깨닫게 되는 삶의 지혜였다. 그리고 또 하나, 늦은 시간에 3차, 4차로 여기 오면 두 분의 언성이 항상 높아진다. 개인의 감정 다툼은 아니다. 굳건한 가치관과 가치관이 부딪히며 온갖 삶의 철학과 신념이 드러나는, 그야말로 지적인 향연이 펼쳐진다.


   주문한 생맥주 석 잔이 먼저 나왔다. 벌컥벌컥 들이키는 두 작가님과 달리 나는 마시는 척만 하며 살짝 홀짝였다. 곧장 B 작가님의 반박이 이어졌다. 세상이 원래 그런데, 불평불만 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그 시간에 내가 뭘 할 건지 고민하는 게 훨씬 낫지. A 작가님은 기본 안주로 나온 말린 멸치 몇 점을 집어 먹더니, 이내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렇게 신경 안 쓰다 보면, 정작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은 엉뚱한 데 있고, 자격이 없는 사람이 이 분야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리에 앉게 되지 않습니까. 각자의 논리로 무장한 두 작가님의 논쟁이 뜨거워지려는 그 순간, 방금 고온의 기름에서 튀겨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옛날 통닭 한 마리가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이중으로 장갑을 낀 주인아주머니가 직접 닭을 바르기 시작했다. 다리와 목, 날개, 가슴살 등이 하나둘 해체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배가 불렀지만 겉은 바삭하면서 안은 촉촉해 보이는 닭 조각을 보자 식욕이 다시금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상이 다 문제이고, 바꾸고 싶은 게 많으면 정치를 해야지. 먹음직스러운 안주로 인해 잠시 휴전 상태에 들어갔던 논쟁은, B 작가님의 반박과 함께 다시금 시작되었다. 노래 잘한다고 가수 되고, 글 잘 쓴다고 작가 되고, 그림 잘 그린다고 화가 되는 게 당연해 보이긴 한데, 세상의 논리랑은 거리가 멀지. 아무리 노래 잘 불러도 다른 끼나 재능, 색깔이 있어야 인기를 얻을 수 있고, 아무리 글 잘 써도 협회장, 회장 이런 거 하려면 인맥 관리도 잘하고 윗사람한테 잘 보여야 하는 게 현실인데. 나보다 노래 못하는 사람이 인기가 더 많다고 불평불만 하는 건, 세상을 너무 낭만적으로 보는 거지. 짧게 짧게 치고받았던 앞의 논쟁과 달리, 이번에 나온 B 작가님의 주장은 논리가 꽤나 탄탄했다. A 작가님의 입에선 과연 어떤 대답이 나올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얼른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나는, 어느새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두 작가님의 논쟁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장님, 여기 생맥주 두 개 더 주세요. 술집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금세 생맥주 한 잔을 깨끗하게 비운 두 작가님의 주량에 흠칫 놀랐다. 정오는 거의 안 먹었노. 아, 1차 2차 때 많이 먹어서... 관심이 나에게로 향하는 건 원치 않아. 일부러 말끝을 흐리며 힘없이 대답했다. 그보다 A 작가님의 대답을 듣고 싶었다. 과연 어떤 논리로 B 작가님의 말에 반박할 것인가. 맞는 말씀이긴 한데, 잘못된 걸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실력 없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나 후배들 제대로 챙기지도 않고, 윗사람한테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사업을 따내고, 좋은 자리에 앉고, 마치 그 분야에서 지역을 대표하는 사람처럼 인식되어 버리면 어떡합니까. 저희야 같은 세대이기도 하고, 굳이 그들과 경쟁하지 않아도 혼자 밥벌이는 할 수 있지만, 이제 막 이 분야에 발을 디디는 후배나 청년들에게 ‘선배 세대’의 기준이 누가 될 거냐는 겁니다. 그런 사람을 동경하고, 꿈꾸고, 그러다 우연히 그들과 같이 일하다가 결국 지쳐서 나가떨어지고 마는 게 반복될 수 있잖습니까. A 작가님의 논리는 B 작가님의 논리만큼이나 강력했다. 야금야금 먹고 있던 맥주잔은 어느덧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한 잔 더 시킬까 말까, 고민을 하는 사이 B 작가님은 어느새 생맥주 한 잔을 더 주문했다. 역시나 말은 생각보다 빨랐다. 그렇게 내가 먹을 맥주 한 잔을 주문 당해 버렸다.


   후배 세대나 청년들을 너가 어떻게 다 책임지겠다는 거고. 아니, 다 책임지겠다는 게 아니라... 논쟁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정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니 토론이 말끔하게 해결될 가능성은 애초부터 희박했다. 옳고 그름은 없고 개인의 생각만이 둥둥 떠다니는 이곳 술자리, 그렇다면 나는 어떤 입장일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개인의 문제인가, 시스템의 문제인가. 어느 쪽이든 일리가 있었고, 두 작가님 모두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을 만큼 치열한 삶을 살았다. 이렇게 밤늦게까지 논쟁을 벌이더라도, 자신이 살아온 그 방식으로 남은 삶을 또 치열하게 보낼 분들이기도 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에이, 술자리에서 이렇게 복잡한 생각을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아직 어떤 결론을 내리기엔 서른은 젊은 나이였다.


   마지막 남은 닭 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 차갑고 퍽퍽한 식감은 오랜 시간이 흘렀음을 이야기해 주는 듯했다. 술자리는 끝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개인의 문제인지, 시스템의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그보다 내 앞에 앉은 두 분의 건강이 더 걱정되었다. 무슨 술을 저렇게 많이 드시는지. 개인이 잘하면 된다는 B 작가님은 얼른 개인적으로 몸 관리를 했으면 싶고, 시스템이 중요하다는 A 작가님은 자신의 몸을 건강하게 해줄 시스템을 얼른 만들었으면 싶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 작가님의 다툼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피곤하긴 하지만, 자세히 귀 기울이니 또 점점 빠져든다. 역시나 싸움 구경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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