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건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서사다

타노스의 핑거스냅보다 강력한 건, 그가 가진 서사의 힘일지도 모른다

by 박정오

지난 2018년 4월에 개봉한 마블 영화 <인피니티 워>는 수익 20억 달러를 돌파하며 전 세계적으로 흥행했다. 이러한 엄청난 인기에는 마블이 2008년 아이언맨으로 시작으로 10년간 다양한 캐릭터를 차곡차곡 쌓아나갔고, 탄탄하게 연결된 세계관과 흥미로운 이야기를 모았다는 배경이 존재한다. 다만 이를 배제하더라도, <인피니티 워>는 무척 매력적인 영화다. 단순히 히어로와 악당의 선악 대결에서 그치지 않으며, 관객에게 혼란을 주며 더 나아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그 이유는 우주 생명체의 절반을 없애려는 빌런 ‘타노스’에게 충분한 서사가 부여되기 때문이다.


타노스의 고향 ‘타이탄’은 원래 부유한 행성이었다. 하지만 한정된 자원을 가진 세계에서 문명이 발달하고 사람이 늘어나면 필연적으로 생존의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타노스는 이를 지적하며 인구의 반을 무작위로 죽이는 것을 제안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타노스의 주장은 동족들에게 외면받는다. 결과적으로 타이탄은 황폐해졌고, 타이탄족은 멸종의 위기를 맞는다. 고향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빠져있던 타노스는 우주를 파멸에서 건져내겠다는 거창한 대의를 가지며 인피니티 스톤을 모으기 시작한다.


미래의 파멸을 막기 위의 생명의 절반을 없애겠다는 주장은 허무맹랑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고향이 황폐해지는 과정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본 타노스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으며, 더 나아가 대의를 위한 강력한 명분이자 동력원이 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자신이 사랑하는 수양딸 가모라를 희생시키며 눈물 흘리는 모습은 관객들의 감정을 툭 건드린다. 그의 거창한 목표가 무겁고 비장하게 다가오는 순간이다. 타노스가 악당이라는 걸 알면서도, 관객들은 그를 무작정 비난하기 어려워진다. 간단하게 선악으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일을 복잡하고 머리 아프게 만드는, ‘서사’가 주는 강력한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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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년간 한국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몇몇 사건이 젠더에 관한 사회적 담론을 남기며 이어져 왔다. 소라넷, 버닝썬, 정준영 단톡방, 심석희 코치 성폭행, 김학의 성접대 등 일상은 물론 연예계, 체육계, 정치계까지 각 분야에 걸쳐 비상식적인 사건이 우리 눈앞에서 펼쳐졌다. 많은 사람의 입에서 오르내리며 이슈가 되었지만, 이러한 아픔을 겪고도 사회는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오히려 가혹하고 처참하다 못해, 소설이나 영화로도 담지 못할 비현실적인 사건이 우리 앞에 적나라하게 펼쳐졌다. 여느 사건이 그랬듯, 젠더 문제에 관한 우리나라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지표로 기록될, 'n번방 사건'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주목할 부분은 n번방 이후 우리 사회에 드러난 모습이다. 극악무도한 범죄 형태에 경악하기보다, 관련 영상을 검색하는 2차 가해가 이어졌다. 걸그룹 출신 멤버도 포함되어 있다는, 도무지 의도를 알 수 없는 언론 보도는 2차 가해의 불길에 더욱 기름을 부었다. n번방 운영자 중 한 명인 '조주빈'의 신상이 공개되자 많은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 손가락질했지만, 피해자 보상에 관한 보도가 나오자 그 손가락은 고스란히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로 향했다.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온갖 혐오의 언어가 오가기 시작했다. 인간에 대한 존엄이 사라질 법한 온갖 학대를 받으며 근근이 삶을 견뎌온 피해자들의 인격은 다시금 짓밟히기 시작했다. 조주빈은 개인을 넘어 집단의 형태로 다시금 되살아난 것이다.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만큼 중요한 건 피해자들을 보듬고 위로하는 일이다. 여기에 있어서 중요한 건 가해자의 서사가 아닌 피해자의 서사이다. 피해자의 대부분이 10대 여자 청소년이라는 사실을 생각했을 때, 처음엔 청소년기의 자그마한 일탈로 시작했을 가능성이 크다. 몇몇 가해자들이 이들의 약점을 잡고 성 착취를 했다면, 우리는 이러한 사건을 가능하게 한 사회적 안전망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피해자들이 어떠한 이유로 일탈을 시작한 건지, 어떠한 과정을 통해 범죄의 대상이 되었는지, 어떤 불안과 고민으로 늦은 밤까지 잠 못 이루었는지, 비인간적인 범죄 행위에도 어떠한 이유로 주위에 도움을 요청하거나 경찰에 신고하지 못했는지, 우리가 고민할 문제는 피해자가 왜 보상을 받는지가 아닌 이러한 서사다.


피해자의 서사를 알 때, 우리는 수많은 피해자 중 한 명이 아닌 이름을 가진 개인으로, 좋아하는 음악과 음식, 영화가 있는 평범한 청소년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땐 피해자에 대해 함부로 얘기할 수 없다. 적어도 '자기가 쉽게 돈 벌려고 하다가 범죄에 휘말린 건데, 왜 국가에서 지원해주냐'와 같은 내용의 댓글이 수백 개, 수천 개씩 달리고, 피해자에 대한 지원을 막아달라는 국민청원에 수천 명이 동의하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피해자가 처한 상황과 환경에 주목하지 않고 그들을 납작하게 이해하는 순간, 피해자의 서사는 사라진다. 서사가 사라진 자리에는 무조건적인 혐오만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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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번방 사건을 개인의 일탈로만 치부할 수 없고, 앞뒤 맥락을 살펴보며 가해자가 처한 상황과 환경, 그에 따른 심리 변화를 분석하는 행위도 필요하다. 오로지 한 개인을 악마로 만드는 것과 여러 요소를 분석해서 그와 비슷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건 엄연히 다른 일이다. 특히 후자쪽은 사회적인 차원에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가 그동안 가해자의 서사에만 지나칠 만큼 많은 관심을 보여왔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2차 가해가 만연하고 피해자를 향한 혐오가 발생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피해자의 서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주 생명의 절반을 없애겠다는 극악무도한 악당마저 서사를 가지게 되면 비난이 사그라지고, 공감과 이해, 연민의 시선을 받게 된다는 걸 우리는 이미 많은 영화와 드라마, 책 등에서 충분히 경험했다. 때때로 주인공보다 악당이 더 멋있게 느껴지는 바로 그 순간들이다. 타노스가 인피니티 스톤을 모두 모아 초월적인 힘을 얻었다는 사실보다 무서운 건, 그가 가진 강력한 서사에 설득되어 끔찍한 범죄에 면죄부를 주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결국 우주의 절반을 날려버린 타노스의 핑거스냅보다 강력한 건, 그가 가진 서사의 힘일지도 모른다. 이 강력한 힘을 어디에 부여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어벤져스의 편에 설 수도, 혹은 타노스의 편에 설 수도 있다. 당신은 누구의 편에 서서 싸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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