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 들어오고 처음 편집을 맡았던 책은 육아 에세이였다. 저자는 아이 두 명을 키우는 주부였는데, 모성애를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에 맞서 엄마이기 전에 한 명의 여성으로서 솔직한 욕망을 글로 쓰고 있었다. 당시 내가 만들었던 글쓰기 모임에서 처음 만났는데, 글이 워낙 좋아 곧장 출간 계약을 했다. 그렇게 내가 처음으로 편집한 책이 세상 밖에 나왔다.
두 번째로 편집한 책은 페미니즘 에세이였다. 저자는 운동을 무척 좋아했고, 비혼주의자이자 페미니스트였다. 저자는 다양한 운동에 도전하며 여러 체육관을 오갔고, 자연스레 ‘운동하는 여성’을 향한 사회적 시선을 많이 느끼고 고민하게 되었다. 저자는 그 고민을 글로 풀어 한 온라인 플랫폼에 연재했는데, 내가 우연한 기회로 그 칼럼을 본 것이다. 그렇게 또 한 권의 책이 출간되었다.
편집자 직함을 달고 기획한 두 개의 콘텐츠는 저자가 모두 여성이었고, 주제 역시 사회가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에 관한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페미니즘에 큰 관심이 없었고, 무엇보다 여성에 관한 책을 기획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없었다. 그저 우연이라 생각했다. 새로운 저자를 발굴하고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무언가를 만드는 게 내 역할이었기에, 이후로도 열심히 콘텐츠를 찾았다. 그렇게 두 권의 책을 기획하고 1년 6개월이 흐른 지금, 4~5권의 책을 현재 기획 중이다.
동물권, 청년 노동자, 딩크족, 방과후 강사, 문화예술법 등 주제는 제법 다양했다. 다만 한 명을 제외하면 모두 여성 저자였다. 너무 여성 저자에게만 치우치는 게 아닐까 싶어 최대한 다양한 소재를 찾기 위해 노력했는데, 결과적으로는 한쪽으로 몰린 셈이다. 내가 관심 가지는 주제와 문체 등은 주로 여성의 글과 가깝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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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남중, 남고, 공대를 나와 항상 남자가 득실거리는 환경에서 지냈다. 어렸을 적부터 책 읽고 글 쓰는 데 관심이 많았던 내가 항상 들었던 이야기는 ‘여성스럽다’였다. 소심하고, 예민하고, 섬세하다는 건 글을 쓸 때 강점이었지만, 남자들의 세계에선 단점을 넘어 좋은 먹잇감이었다.
대학교 역시 마찬가지였다. 공대를 벗어나 다양한 학과 학생들을 만났지만, 책 읽는 대학생 자체가 거의 없었다. 그중에서 남자 대학생은 멸종위기종에 가까웠다. 책에 전혀 관심이 없는데 글 쓰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한 남자들이 사회에 나왔으니, 이들이 책과 글에 전혀 흥미가 없는 건 오히려 당연했다. 이로써 주위 또래 남자 중에 저자를 찾는 건 불가능했다. 고학번 선배들의 모습도 우리와 다르지 않았으니, 책 읽는 남자의 부재는 또래를 넘어 ‘30대’의 문제이기도 했다.
그저 취향의 차이, 시야의 차이라고 하기엔 하나의 현상에 가까웠다. 왜 20대, 30대 남자는 책과 글에 관심이 없을까. 왜 30대 남자인 나의 시야에는 여성 저자의 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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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건, 곧 타인의 삶에 관심 가지고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행위라 생각한다.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걸 깨닫고,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며 더 성장하고 배우기 위해 노력하는 행위가 곧 독서와 글쓰기인 셈이다. 더 나아가, 타인 혹은 사회에게 커다란 상처를 입은 사람이 보통 책을 읽거나 글을 쓰기 시작한다. 사회에서 인정해주고, 별다른 불편함이 없고, 아픈 기억이 없는 사람이 책과 글에 관심 가지긴 어렵다는 의미다. 누리는 게 많고, 상처받을 필요가 없는 이들에게 독서와 글쓰기만큼 쓸모없는 행위는 없다. 20대, 30대 남자가 힘들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또래 여성들이 책을 많이 읽고 적극적으로 글을 쓴다는 것과 비교했을 때 취향과 관심사를 넘어서는 사회적인 요소가 존재하는 게 분명했다.
그저 내가 속한 집단을 비판한다고 해서 쉽게 해결될 문제는 아니겠지만, 내가 오랫동안 품었던 의문에 대해 누군가 답을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왜 남자가 득실거리는 환경에서 살아온 내 주위에는 책 읽고 글 쓰는 사람이 거의 없었는지, 대부분 사회에 진출한 현재에도 왜 없는지, 왜 20대, 30대 남성 저자를 찾기가 어려운 건지, 책과 글을 좋아하는 나는 왜 항상 독특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