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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오 Aug 21. 2020

우리는 모르는 것에 대해서만 혐오한다

혐오를 넘어서는 첫 단계는 들어주는 거다

   대학 시절, 대기업에 들어가는 이들을 싸잡아 비판했었다. 그들은 자본과 타협한 거라 생각했다. 공대로 진학해서 인문학, 철학 등에 관심을 보이며 다양한 책을 읽어나갔던 개인적인 상황이 이러한 감정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전공과 작가라는 꿈 사이에서 갈등하던 나는, 불안함을 주위 사람을 향해 한껏 날을 세우는 거로 해소하곤 했다. 그러다 세월이 흘렀고, 가까운 지인이 하나둘 대기업에 들어갔다. 자연스레 그들의 삶에 관심을 기울였다. 연봉 6천, 8천의 삶은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화려하지 않았다. 돈을 많이 버는 만큼 업무 강도가 높았고, 커다란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 역시 미래를 불안해하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었다. 그들의 이러한 모습은 오히려 애잔하고 안타깝게 다가왔다.      


   비슷한 이유로, 공무원 혹은 공기업을 준비하는 이들을 향해, 꿈이 없는 사람이라며 손가락질했었다. 세월이 흘러 공기업에 들어가거나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이들이 주위에 하나둘 생겨났다. 그들 역시 하고 싶은 게 무척 많았다. 먹고살기가 워낙 힘들어진 사회 속에서, 오히려 안정적인 직장을 바탕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걸 차근차근히 해나가고 있었다. 오히려 공기업, 공무원이기 때문에 겪는 고충과 애환이 많았다. 그들의 감정이 내 가슴속에 조금씩 스며들었다.     


   세상에 신은 없다고 굳게 믿었다.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건 실체가 없는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닌, 이성과 합리, 인문학적인 사고, 스스로 중심을 잡을 수 있는 강인함이라 믿었다. 종교에 기대는 사람은 나약한 사람이라 확신했다. 그러다 종교인과 종종 만나는 일이 있었고, 그중 몇몇은 부쩍 가까워지기도 했다. 그들은 막연하게 신앙에만 기대는 게 아니라, 현실을 하나둘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들은 종교의 폐단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다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좋은 면과 나쁜 면이 공존하듯 종교도 마찬가지였고, 그들은 종교의 좋은 면을 보면서 세상을 좀 더 밝게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페미니즘 운동을 지지했지만, 과격한 부분도 있다고 생각했다. 한국사회가 남성 중심으로 흘러가는 탓에 여성이 겪는 차별과 억압이 많다는 사실을 인정했지만, 남녀가 극단적으로 갈라져 첨예하게 대립하는 것만이 해결방법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러다 회사 일을 통해 페미니스트를 몇몇 만났다. 그들이 당한 차별과 부당한 대우, 사회적인 억압과 폭력이 아프게 다가왔다. 겉으로는 과격해 보이는 이들 역시, 그 일상을 들여다보면 우리와 별 다를 바가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오히려 감수성이 풍부했고, 마음이 더 여렸다. 자신이 느낀 차별과 억압을 없애는 것에서 출발하여, 자신이 받은 상처를 다른 사람은 받지 않도록 노력하는 모습, 자기 주위 사람, 후배, 자식 세대는 지금보다 좋은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절절하게 다가왔다. 과정에서의 과격함이 있더라도, 애달프고 절절한 마음을 함부로 비난할 수 없었다.


   *     


   무언가를 비난하기 전에, 그것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세상 모든 것에는 양면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자신의 눈에 비친 일부의 모습만으로 마치 전부를 아는 것처럼 평가하는 행위는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직접 만나보지 않고 뉴스 기사로만, SNS상으로만, 실체 없이 떠도는 소문으로만 접해서 판단하는 건 아쉬운 걸 넘어 위험한 행위다. 우리가 방구석을 벗어나야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무언가에 대해 알기 위한 첫걸음은 실체를 가진 존재를 만나는 것이다. 물론 그 한 사람이 자신이 소속된 집단을 상징하거나 대표할 순 없지만, 한 개인에게는 그 집단의 색깔과 향기가 아주 조금씩은 녹아 있다. 그런 개인들이 모여 집단을 이룬다. 생각해보면 집단만큼 추상적인 개념이 또 없다. 결국 집단을 만날 수 없는 우리는 지금 눈앞에 있는 개인을 주목해야 한다.      


   세상에 마냥 나쁜 것은 없다. 무엇이든 자세히 들여다보고 이해하기 위해 한 걸음 다가간다면, 우리가 알지 못했던 것들을 하나둘 볼 수 있다. 공감과 소통은 나와 생각이 일치하는 사람들 사이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나와 생각이 다른 존재들과 이러한 과정과 부단한 노력을 통해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모르는 것에 대해서만 혐오한다.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거나 공감하기 위한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 바로 그 순간, 혐오가 시작된다. 내가 아무리 아프고 힘들어도 주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각자의 고통을 이야기할 뿐이다. 여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서 나의 힘듦을 타인이 알아주고 이해해주길 바라는 건 욕심이자 오만이다. 혐오를 넘어서는 첫 단계는 들어주는 거다. 복잡하지도 어렵지도 않다. 그거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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