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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오 Feb 26. 2021

다섯 번째 기획도서를 세상에 선보이며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빌려 나의 다섯 번째 흔적을 세상에 남긴다

지난 7월, 졸음이 쏟아지는 나른한 오후를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그러다 네이버 메인화면에서 재미있어 보이는 글을 하나 우연히 발견했다. <'인종차별' 혐의 받는 문화예술 콘텐츠? 무엇이 문제일까>라는 제목의 글이었고, 디즈니 영화 <모아나> 포스터 이미지가 함께 네이버 메인화면에 당당히 자리 잡고 있었다. 내용을 보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라이온킹>, <모아나>, <복학왕> 등 잘 알려진 콘텐츠를 예로 들며 인종차별법, 차별금지법을 이해하기 쉽게 소개하고 있었다.

마침 따분한 업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글을 금세 읽었다. 이거 책으로 엮으면 재미있겠는데! 졸음은 금방 달아났다. 연재 콘텐츠처럼 보여 검색을 했더니, 아뿔싸, 내가 본 글은 <백세희 변호사의 아트로(art law)>라는 제목으로 이미 1년 전부터 연재 중이었다. 국내 최대 웹 사이트에서 정식 연재를 하는 것은 물론 반응이 좋아 메인화면에도 노출되고 있었고, 무엇보다 1년 넘게 연재했으니 진작 다른 출판사와 계약을 했을 거라 확신했다. 거절당하더라도 연락은 해보자 싶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메일을 보냈는데, 놀랍게도 긍정적인 대답을 들었다. 이후 책 출간이 확정되었고, 계약이 진행되었다. 마침 야심 차게 기획하던 책이 엎어지며 고민에 빠져 있었는데, 놀랍게도 하나의 문이 닫히자 하나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이미 책 한 권 분량에 가까운 글이 모여 있었지만, 연재된 글을 단순히 묶어 출간하는 건 여러모로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작가님과 여러 번 의견을 주고받으며 책의 컨셉을 조금씩 잡아 나갔다. 부끄럽지만 나는 문화예술계에 종사하면서도 정작 문화예술 분야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어, 작가님의 글을 읽으며 처음 접하며 조금씩 배워나가는 게 많았다. 전문적인 지식과 탄탄한 실무 능력, 이리저리 흩어진 원고를 멋지게 엮는 역량 등으로 작업을 이끌어가야 하는 편집자가 수강생이 되어 그저 글이 재미있다고 감탄만 하고 있었느니, 돌이켜보면 참으로 미숙한 모습이었다. 더군다나 그동안 기획한 책과 장르가 사뭇 달라, 작업 중간에 더욱 헤매지 않았나 싶다.

책의 저자 백세희 작가님은 미대 입시 낙방 후 사법시험을 합격해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 다채로운 이력이 변호사의 시선으로 문화예술 분야를 바라보는, 독특하고 신선한 콘텐츠의 원천이 된 셈이다. 나 역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출판사 편집자 생활을 하고 있기에, 작가님의 이력이 더욱 독특하게 다가왔던 거 같다.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한 기획이 아니라 이미 기획 연재를 하고 있던 콘텐츠를 책으로 묶었던 만큼, 이번 작업은 편집자의 입장이 아닌 독자의 입장에서 진행하지 않았나 싶다. 진지한 걸 싫어하며 복잡하고 어려워진다 싶으면 바로 방향을 틀고, 독자와 계속해서 장난을 치고 농담을 주고받고 싶어 하는 작가님의 글을 읽다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오곤 했다. 소재도 흥미로웠지만, 작가님의 문체 역시 그에 못지않은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의 직업 혹은 분야를 선택하면, 그 분야에 대해서는 점점 익숙해지고 더 나아가 전문가가 될 수 있지만, 그 외의 분야는 자세히 알기 어렵다. 그것은 단순한 지식을 넘어, 자신의 선택한 세계 외에 다른 세계를 경험하기 힘들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떤 세계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뀐다. 같은 영화를 보더라도 누군가는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는 주인공의 진취적인 모습을 발견하고, 누군가는 인종차별을 떠올릴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아쉽게도 우리는 모든 직업을 경험해볼 수 없고, 모든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없다. 이것은 곧 타인의 생각과 시선에 계속해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편집자는 다양한 세계를 업무로 만날 수 있는 몇 안 되는 직업 중 하나다. 아이를 키워보지 않아도 육아 에세이를 기획할 수 있고,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청년노동자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은 책을 만들 수 있다. 그렇게 책을 열심히 만들면 수고했다고 회사에서 월급까지 주니, 여러모로 괜찮은 직업이다. 이번 책 역시 작업하는 과정에서 내가 전혀 몰랐던 새로운 것들을 많이 배울 수 있고, 더 나아가 내가 느낀 재미를 보다 많은 사람에게 권유할 수 있게 되었다.

"영화, 드라마, 웹툰, 음악 등 재미있고 흥미로운 콘텐츠가 차고 넘치는 시대. 뉴스에서는 각종 소식을 전하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다. 그중엔 복잡하게 얽힌 사건·사고도 있고,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경험하거나 만날 수 있는 문제도 있다. 이 책은 우리가 별생각 없이 흘려보낼 수 있는 것들을 콕 집어내 법정 위에 세운다.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온갖 법률 지식과 날카로운 시선, 참신한 분석이 법정을 가득 메운다. 이 흥미로운 국민참여재판의 배심원은 바로 독자 여러분이다." - 편집후기 中

그렇게,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빌려 나의 다섯 번째 흔적을 세상에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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