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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오 May 02. 2021

그렇게 생각하면 아무것도 기획 못하잖아요

뭐가 그리 걱정되고, 뭐가 그리 불안했던 걸까

요즘 어떤 고민이 있냐는 선배님의 물음에,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2020년 새해를 맞이하는 시점, 패기 넘치던 20대 청년은 어느새 30대를 맞이했고, 회사에서 보낸 시간도 2년이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가 어떤 일을 하는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더 나아가 이 일을 내 적성에 맞는지 알아차리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은 기간이기도 했다. 처음 회사에 들어올 때만 해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먹고살 수 있게 되었다며 한껏 들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하는 일이 부담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서 입사 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고민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 일이 정말 내게 맞긴 한 걸까.

- 제가 회사에 들어오고 책 두 권을 기획했잖아요. 운이 좋아서 나름의 성과를 거두긴 했는데... 그 이후로 1년 넘게 책을 기획 못하고 있잖아요. 물론 회사 일이 많고, 주어진 일을 해내는 것도 벅차긴 한데... 주어진 일들만 하다 보면 책 만드는 일에 큰 의미를 못 느낄 거 같은 불안감도 있고...

나보다 1년 일찍 들어온 회사 선배님과, 공간을 운영하는 매니저 형과 셋이서 어느 낯선 도시의 밤거리를 나란히 거닐고 있었다. 새해를 맞아 함께 공간을 이용하는 식구들끼리 워크숍을 왔고, 우리는 오후 일정을 마친 후 식당으로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대표님을 비롯해 다른 분들은 저만치 앞에서 서너 명씩 뭉쳐 걸어가고 있었고, 우리 셋은 따로 뒤따라가고 있었다.

- 에이. 정오 씨는 편집자 일이 처음이잖아요. 이제 2년 조금 넘었죠? 그래도 처음 기획한 책들 모두 2쇄 찍었잖아요. 그것도 대단한 건데.

선배님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특유의 경쾌하고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 그리고 출판 일만 하는 것도 아니고, 문화기획 일도 많이 하잖아요. 잡무도 많고. 충분히 잘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 그때 따로 워크숍 했다며. 무슨 일 있었나?

매니저 형의 물음에 잠시 망설이다, 속으로 품어왔던 이야기를 어렵게 꺼냈다. 저번 주에 대표님이랑 선배님, 그리고 저까지 셋이서 워크숍을 했잖아요. 그런데 대표님이 그러시는 거예요. 올해 기획도서가 왜 한 권밖에 없냐고. 크게 혼나거나 한 건 아닌데, 괜히 억울하고 또 화나더라고요. 2019년 한 해 동안 제가 편집한 책만 10권이 넘었어요. 그중 작가가 여러 명인 도서들이 많아서 만만치 않은 것도 제법 있었고요. 거기다 선배님 말처럼 문화기획 일도 몇 개나 하고, 그 외에도 서류 보내고 메일 답장하고 미팅 같은 잡무들도 많았고요. 기획할 시간이 없었는데, 왜 기획이 없냐고 하니까 순간 화나더라고요. 거기다 가끔 몇몇 글을 보여주면서 이런 방향으로 책 만들어보면 어떻겠냐고 하면, 대부분 잘 모르겠다는 답변을 들었고요.

- 오, 정오 씨 불만 많았네요. 대표님한테 다 얘기해요.
- 이런 일이 반복되니까 진짜 이 일이 나한테 맞을까 고민이 들더라고요. 운이 좋아서 두 권 책을 기획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초심자의 행운이었다는 생각이 들고. 고작 2년 만에 이렇게 성과도 못 내고 불만만 쌓이는 거 보니까 벌써 바닥을 드러낸 게 아닐까 싶고.
- 그래서 이직 고민한다는 거야?
- 정오 씨 나가면 안 돼요. 직원이 저랑 정오 씨 두 명밖에 없는데!

갑자기 이야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자, 오히려 내가 깜짝 놀랐다. 나는 당장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뇨. 그렇게까지 생각한 건 아니고... 아무튼 그렇게 투덜대다가, 좀 더 깊이 생각해봤어요. 제가 작년에 첫 단행본을 냈잖아요. 분명 회사 일도 열심히 하긴 했는데, 새로운 책을 기획하고 싶은 마음보단 내 글을 쓰고 싶다, 내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더 강했던 거 같더라고요. 정말 책 기획은 엄두도 못 낼 정도로 그렇게 바빴을까 하면, 그 정도는 아니었거든요. 방향이 조금 안 맞았던 거죠. 그리고 바쁜 와중에도 책을 기획해서 그걸로 성과를 내야, 하고 싶지 않은 일을 거부할 힘이 생길 거 같았어요. 어쨌든 회사는 돈을 버는 장소이지, 개인적으로 자아실현하는 곳은 아니잖아요.

- 그럼 이제부터 기획 많이 하면 되겠네요.
- 그런데 또 이렇게 생각하니까, 성과를 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선뜻 기획을 못하겠더라고요. 기회가 많지 않은데, 당장 성과를 못 내면 힘이 사라지고, 그럼 다시 주어진 일을 해야 하잖아요.
- 에이. 모든 책이 다 잘 될 순 없죠. 잘 안 될 수도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아무것도 기획 못 하잖아요. 그냥 해 보면 되죠. 그냥 정오 씨가 생각하는 것들 이제부터 다 해 봐요. 아직 젊잖아요! 어리고! 왜 회사 돈 걱정해요! 책 안 팔리면 또 대표님이 돈 구해오시겠죠!

선배님의 마지막 말에 셋이서 동시에 빵 터져서 소리 내어 웃었다. 그와 함께 요 며칠 꽤 무겁던 머릿속도 조금은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무 것도 기획하지 못한다는 말이 유난히도 머릿속을 맴돌았다. 잘 안 될 수도 있지만, 잘 될 거라는 믿음으로 행동하는 것.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홀로 끙끙 앓았던 걸까. 뭐가 그리 걱정되고, 뭐가 그리 불안했던 걸까. 순간 저 멀리서 걸어가고 있던 대표님이 뒤를 돌아보며 우리를 쳐다봤다. 무슨 얘기하는데 그렇게 웃노. 내 욕하는 거 아니지? 식당 다 왔다. 저기다, 저기. 순간 뜨끔했지만, 다행히 다시 고개를 돌리는 대표님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 너머로 우아한 느낌을 물씬 풍기는 주택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 저녁은 가정식이라는 말을 얼핏 들었던 거 같다.

한겨울의 차디찬 바람이 온몸을 스쳐 지나갔다. 오늘 너무 얇게 입은 걸까. 추위에 몸이 살짝 떨렸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바람이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바람이 이렇게 차갑다는 건 겨울도 정점을 맞이했다는 걸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제는 따스한 봄으로 가는 여정만 남은 셈이다. 지금은 고통을 주는 찬 바람도, 이제 곧 살랑살랑 마음을 녹이는 봄바람이 되지 않을까.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요. 그럼 밥 먹으러 가죠. 우리는 나란히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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