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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오 Nov 16. 2019

로컬리티라는 환영

가까이서 바라본 '로컬리티'의 민낯은, 결코 우아하지 않았다

   회사 메일로 원고 투고가 왔다. 이미 잡혀있는 출간 일정도 빠듯하고 원고 내용이 우리 출판사가 추구하는 방향과 조금 거리가 있었다. 하루에도 몇 통씩 투고 원고가 메일함에 쌓이기에, 일일이 거절 답장을 하는 건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어떤 이유 때문에 거절하는지를 하나하나 설명하는 건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원고를 투고한 분은 지역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작가이기도 했고 대표님과 안면도 있어, 평소와 달리 출간이 어려운 이유까지 밝히며 정중히 거절 메일을 보내기로 했다. 


   출간이 어렵다는 메일을 보내면, 보통은 아쉬워하며 다음번에 책을 내면 좋겠다는 답장이 오는 편이었다. 답변이 정중할수록 출판사 역시 아쉬운 마음이 더 커졌다. 원고 내용이 출판사의 방향과 맞지 않은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외 다른 이유로 거절하는 경우에는 괜히 마음이 불편해지곤 했다. 개인의 호불호를 떠나 모든 글은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한 사람의 진솔하고 내밀한 이야기를 세상 밖으로 내놓는 것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출판사는 의미와 가치만으로 수백만 원이나 되는 돈을 섣불리 투자할 순 없는 입장이다. 또한 창작 지원금을 받아오든, 출간 후 저자가 책을 구입하며 초기 제작비를 충당하든, 그렇다고 출판사가 손해를 안 본다는 이유만으로 무작정 책을 내기도 어렵다. 그리고 이 모든 걸 충족하더라도, 좋은 원고가 오면 기다렸다는 듯 바로 그 책을 작업하는 경우는 단연코 없다. 늘 바쁘고, 없는 시간을 쪼개면서 작업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즉 한 권의 책을 내기 위해선 경제적 여유, 시간적 여유, 그리고 출판사의 색깔과 방향까지 모두 충족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이번에 받은 투고 원고도 마찬가지였다. 작가님이 정성스레 쓴 원고였고, 다루는 소재나 글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 역시 나름의 의미와 가치가 있었다. 아쉽긴 했지만, 우리 출판사에서 출간하긴 어려웠다. 그뿐이었다. 출판사는 법정이 아니기에 옳고 그름을 따지는 곳이 아니었다. 다른 출판사에서 책이 나오면 베스트셀러가 될지 몰라도, 이와 무관하게 각 출판사는 나름의 기준과 가치관, 신념이 존재했다. 하루에도 몇 통씩이나 투고 원고가 오고, 그에 대해 거절 메일을 보내곤 했기에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이번 일도 평소처럼 마무리될 거라 예상했다.


   거절 메일에 대한 답장으로, A4로 몇 장씩이나 되는 장문의 글이 왔다. 내용인 즉 다음과 같았다. 첫 번째, 자신의 작품은 여기저기서 상을 받으며 이미 검증되었는데 왜 책을 내주지 않느냐고 했다. 두 번째, 우리 출판사에서 나온 책들의 상품성을 공격하고, 우리 출판사 저자들을 폄하했다. 세 번째, 지역 작가 대부분이 어려운 상황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으니, 지역 출판사는 웬만하면 지역 작가의 책을 내주는 게 맞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왜 부산의 출판사가 부산 작가들의 책을 내주지 않느냐며, 그렇게 지역 작가들을 차별하고 홀대하면 지역 사회에서 소문이 안 좋게 퍼진다는 것이다. 이후 대표님과 작가님 사이에 메일이 몇 번 오갔지만, 결국 서로에 대한 오해를 풀지 못한 채 일은 일단락되었다.


   *


   당시 나는 출판 스터디에 참여하고 있었다. 지역 독서모임, 지역 서점, 지역 출판사 등이 모여, 지역 출판의 현황과 과제에 대해 분석하고 고민들을 함께 나누는 모임이었다. 우리가 생각해낸 건 바로 ‘연대’였다. 혹독한 환경에서 책 관련 일로 먹고살기가 쉽지 않았지만, 혼자가 아닌 ‘함께’라면 다르지 않을까, 힘을 합치면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스터디가 끝나면 매번 술집으로 가, 늦은 밤까지 함께 술을 진탕 마시며 이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지역 출판사에서 출간한 책을 지역 독서모임에서 다룬다. 지역 출판사는 지역 작가와 지역 독서모임을 연결해준다, 지역 독서모임은 지역의 서점을 이용한다. 지역의 서점은 지역 독서모임에게 북토크 기회 혹은 공간을 제공해준다. 지역 작가는 지역 독자를 직접 만나 교류한다. 그렇게 뿔뿔이 흩어져 있는 다양한 집단, 그 속의 사람들이 책을 중심으로 새롭게 모인다. 이 과정을 통해 건강한 지역문화 생태계가 만들어진다. 이상적이었지만, 우리가 스터디를 진행하는 목적이자, 우리가 만들고 싶은 문화이기도 했다.


   작가님과 직접 연락한 적이 없었고, 당시 대표님께 의견을 전달하진 않았지만, 가까이서 이 상태를 지켜보는 입장에서 머릿속은 혼란스러움으로 가득했다. 지역이라는 열악한 환경 속에 놓여 있으니, 지역에 있는 사람끼리 뭉쳐서 으쌰으쌰 힘을 합치는 모습을 바라긴 했다. 그럼에도 이번 사건은 다르게 다가왔다. 이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


   “지역의 문학/문화는 소중하다. 하지만 그것을 창조하는 과정은 생각만큼 조화롭거나 평화롭지 않다. 오히려 때로는 치졸하고 비루한 욕망, 세속적인 갈등, 협잡과 정치가 난무하는 장소야말로 지역 local 이기도 하다. 지역에서 문학을 창작/비평한다는 자의식이, 지역이라는 존재 조건을 ‘신성 장소’로 숭배하는 제의의 발문이 되거나 혹은 우리 안의 후진성을 옹호하는 알리바이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비슷한 경우를 목격할 때가 있다. 지역에서 문학/비평을 한다는 것은 ‘중앙중심주의’라는 권위적 문화주의와 대결하는 민주적 투쟁인 동시에, 우리 안의 토착적 기득권을 내파(內波)하는 자기 혁명의 과정이기도 하다.” - 『로컬리티라는 환영』(박형준) 中


   *


   작가님의 예언이 맞았을까, 이번 사건 이후로 우리 출판사에 관한 안 좋은 이야기들이 지역사회에 퍼지고 있었다. 우리 출판사가 지역 작가들을 홀대한다는 둥, 요즘 작가들 사이에서 안 좋은 소문이 돌고 있는 출판사라는 둥, 근거 없는 이야기들이 몇 사람을 건너 우리 귀에 들어오고 있었다. 소문의 출처는 대부분 작가님 본인이었다. 멀리서 바라볼 땐 그저 평화로워 보였던 '로컬리티'는, 가까이 다가가자 그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결코, 우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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