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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소 Nov 09. 2022

따뜻했던 눈사람

우주 속의 하찮은 우리에게

너는 나에게 우주에 관한 이야기를 하곤 했다


'우리가 이 광활한 우주 속에 있다는 게 느껴져? 아직 관측되지 않은 우주 공간이 훨씬 많대. 너무 신기하지?'


이 지구상에 우리가 얼마나 하찮고 작은 존재인지를 설파하는 네가 퍽 사랑스럽고 소년같이 해사해서 나는 그런 너를 사랑했다. 너는 나와 7살 차이가 나는 어른의 면모를 갖춘 늠름한 모습이었지만, 네가 내 앞에서만 보여주는 들뜬 모습들과 실없는 말장난을 건네는 입꼬리들, 좋아하는 유튜버를 보여 마구 웃는 천진난만함을 사랑했다. 운전하는 네 모습을 사랑했고, 뭐가 먹고 싶냐고 물어봐주는 눈빛을 사랑했다. 내 가방을 들어주거나 내 손을 잡아주는 너를 사랑했다. 매우 가끔이었지만, 나를 지긋이 바라봐주는 네 시선 앞에서 나는 영원히 소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주근깨 가득한 얼굴을 햇살 앞에 내보이듯이 부끄러워지는 기분이었다. 


너를 위해서라면 내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겠다고, 너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머리칼을 넘기며 등을 쓸어내리며 생각했다. 턱수염이 거뭇한 너의 얼굴도 나는 그저 아기처럼 느껴졌다. 가끔씩 잠든 너의 얼굴을 매만지며 나는 온 우주의 기운으로 너의 행복을 기원했다. 간절히, 간절히

(너는 무섭다고 잘 때 쳐다보지 말라고 했지만.)


네가 아프지 않기를 슬프지 않기를 넘어지지 않기를 너의 삶에는 누구에게나 있는 장애물이 피해가기를

네가 쓰러지지 않고 우뚝 선 나무같이 살아가기를, 우리가 같이 보낸 650일 남짓한 시간만큼 나를 죄책감 없이 행복하게 했던 시절은 없었으며, 너로 인해 나는 영화같은 순간들을 무수히 맞이했음을 알아주기를.


너와 만남으로 인해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연약한 마음으로도 누군가를 강렬히 사랑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내 마음이 생각보다 강력하다는 것과, 어쩌면 이 사람을 사랑하듯이 나도 사랑할 수 있겠구나 깨닫게 되었다. 너를 만나 나는 더 강해졌다. 너의 노력으로 나는 나를 지키는 법을 배웠고, 부당한 누군가 혹은 사건으로부터 나를 위해 싸우는 법을 연습했다. 또 너는 내가 두려운 일에 회피하지 않고 맞서는 연습을 시켜주었다. 너를 속이고, 돌아가는 게 더 힘든 거야. 모르면 아는 척 하지 말고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해야 해. 다른 사람 신경쓸 거 없이 너만 너한테 떳떳하면 돼. 너가 너를 지켜야지 누가 지켜, 그런 일이 있으면 고민 말고 당장 가서 따져말해. 


네가 하던 말들. 네가 가르쳐주던 것들. 너의 사랑표현이었고 나는 종종 겁이 나서 숨었지만, 너는 나를 일으켜세우고, 강해지도록 만들었다. 겁 많고 비겁한 나를 용기있고 정직한 사람으로 만들어주기 위해 네가 해주던 말들. 잘못하지 않았으면 사과하지 말 것, 수그리지 말 것, 잘 보이려고 애쓰지 말 것


헛되지 않도록 잘 새기고 간직해서 나는 반드시 그런 사람으로 자라날 것이다. 언제 자랐는지도 모르게 자라는 네가 준 몬스테라처럼 나는 부단히 햇빛을 받고 공기 중 습기를 마셔 쑥쑥 여린 잎을 피워낼 것이다. 


한겨울에 만나 잘보이려 얇은 원피스에 코트 한장 걸치고도 보란듯이 춥지 않았다. 마음이 활활 타올라서 정말로 정말로 추위가 없었다. 다 식어버린 핫초코가 나에게 낭만이었고 그날의 눈발이 cg 그 자체였다.


너와 손을 잡던 날, 포옹하던 날, 키스하던 날 나는 그 모든 최초의 순간을 기억한다. 그 때 우리를 지켜보던 눈송이들 하나하나를 기억한다. 사귀기 시작한 초반에, 거의 첫연애였던 나와 달리 넌 깊은 연애들을 해왔기에 나는 네게 특별한 사랑이 아닌 것 같아 시무룩해했다. 그런 넌 나에게, '넌 나의 최초'라는 시를 써주겠다 약속했다. 결국 이별할 때까지 그 시는 구경할 수 없었지만 네가 지나가는 말로, 기억하지도,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했더라도 나는 그 말 자체로도 이미 기쁨을 선물받았기에 너를 원망하지 않는다.


이제 우리의 영화는 막을 내렸고,나의 삶에 가장 야만적이었던 사랑을 너와 함께했다. 장님이 되고 귀머거리가 되었던 나의 무식한 사랑은 생애 다시 없을 기쁨과 고통을 안겨다주며 찬란하게 마무리한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우리의 만남을 되새김질 하는 글이 써질지 모르겠다. 언젠가 이 글이 멈춰질까 두려운 마음으로 너를 떠올린다. 간절히 바라면서도. 


올 겨울의 눈은 함께 맞지 못하겠지만, 눈이 내릴 때마다 너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

네가 건네눈 작은 눈사람. 분명 차가울 텐데 따뜻하게만 느껴지던 그 눈사람, 그 눈들, 그 눈물들.

사진처럼 저장되어버린 그 날의 온기와 기도. 나를 안아주고 기도해주던 다정한 목소리가 정말 따뜻했는데


광활한 우주, 그 속의 작은 지구라는 별, 또 그 속의 하찮은, 서로를 안고 있던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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