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2.
고속도로는 참 편한 길이다.
30킬로마다 휴게소가 나타나고, 기름이 떨어질 만하면 어김없이 주유소가 눈에 들어온다. 눈이 내리면 제설차가 먼저 지나가고, 사고가 나면 순찰차가 달려온다. 그저 제 속도로, 차선 안에서, 규칙대로만 달리면 된다. 목적지는 이미 정해져 있고, 내비게이션은 몇 킬로미터 앞을 내다보며 친절하게 안내한다.
돌이켜보면 직장생활이 그랬다.
출근 시간이 있었고, 해야 할 일이 있었고, 한 달에 한 번 월급이 들어왔다. 때로는 힘들었지만, 그 힘듦조차 어떻게 견뎌야 하는지 대략의 방법이 있었다. 승진이라는 이정표가 있었고, 퇴직금이라는 종착지가 보였다. 나는 그 고속도로를 수십 년 달렸다. 때로는 지쳐서, 때로는 지겨워서 투덜거리면서도 — 사실은 그 길이 꽤 든든했다는 것을, 3개월 전에야 비로소 알았다.
2개월 전, 나는 고속도로 출구를 빠져나왔다.
정년퇴직. 오래 기다려온 날이었다. 홀가분할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나와보니,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낯설었다. 넓고 쭉 뻗은 길 대신, 구불구불한 지방도로가 시작되었다.
낡은 화물차 한 대가 앞을 막고 있다. 추월하고 싶어도 편도 1차선, 마주 오는 차가 있어 꼼짝할 수 없다. 예전 같으면 답답해서 못 견뎠을 텐데, 이제는 그 답답함을 받아줄 회사도, 동료도, 역할도 없다. 그냥 나 혼자 그 길 위에 서 있다.
비가 오면 땅이 꺼지는 비포장도로도 나온다. 천천히 가도 차가 흔들리고, 어디서 웅덩이가 튀어나올지 모른다. 고속도로에서라면 당연했던 것들, 안정, 예측 가능함, 다음 휴게소까지의 거리.. 이 여기선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는다.
어떤 날은, 내비게이션에도 나오지 않는 농로로 들어서게 된다. 안내 방송도 없고, 이정표도 흐릿하다. 그러다 길이 뚝 끊기는 곳에서 '길 없음' 표지판을 마주할 때의 그 허탈함. 열심히 찾아왔는데, 여기까지인가 싶은 그 기분. 낯설고, 조금은 쓸쓸하다.
지나고 보면, 이 길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고속도로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속도를 줄여야만 보이는 것들이. 화물차 뒤를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길가의 코스모스가 눈에 들어오고, 비포장도로를 달리다 잠깐 멈추면 논 냄새가 차창으로 밀려든다. 내비게이션에 없는 농로 끝에서 길이 막혔을 때, 돌아보면 사실 꽤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기도 하다.
수십 년을 고속도로만 달렸다. 빠르게, 효율적으로, 목적지를 향해. 이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달려도 괜찮을 것 같다. 느려도 되고, 돌아가도 되고, 가끔은 길을 잃어도 된다. 처음부터 정해진 목적지 없이 달리는 것, 그것도 하나의 여행이다.
나는 지금 고속도로를 막 벗어난 사람이다. 아직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다 알지 못한다. 내비게이션은 가끔 먹통이 되고, 길은 예고 없이 좁아지기도 한다. 그래도 괜찮다. 수십 년을 달려온 사람이다. 비포장도로쯤이야, 천천히 가면 된다. 핸들을 고쳐 잡는다.
아직 갈 길은 멀다.
(2026.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