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팀장, 스타트업 대표로 살아남기 (1)
'넥스트 데이터'
서울 강남구 역삼동 이면도로 4층 건물의 2층과 3층을 사용하는 우리회사는 올해로 꼭 10년, 직원수 22명정도 된다. 설립부터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정도를 걸어온지라 큰 어려움없이 연매출 30억 정도를 꾸준히 하고 있다.
유리로 된 자동문을 열고 들어오면 좌측으로 '데이터로 만드는 세상'이라고 쓰인 현판이 있고, 우측으로는 직원들이, 정면으로 대표실이 보인다.
우리 회사 대표실 문은 언제나 15도 정도 비스듬히 열려 있었다. 대표는 그것을 '열린 소통'의 상징이라 불렀다. 하지만 5년 차 팀장으로 그 문을 수없이 드나들며 내가 깨달은 것은, 그 문틈이 소통을 위한 통로라기보다.. 음 뭐랄까.. 닫힐 필요가 없어서 열려 있는 문? 찾아오는 이가 없으니 굳이 빗장을 걸어 잠글 이유도 없는, 그런 공허한 개방성 이 더 맞을듯하다.
"강 팀장, 잠깐 들어와요."
모니터 너머로 박 대표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동안 낯선 사람들의 대표실 출입이 빈번했던지라 조만간 뭔가 있을 것으로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는 빨랐다.
나는 무릎 위에 노트북을 올린 채 익숙한 가죽 의자에 앉았다. 면담이라기엔 사무적이었고, 보고라기엔 내 손에 든 자료가 없었다. 박 대표는 한참 동안 마우스를 딸깍거리더니 이내 화면을 끄고 의자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설익은 확신이 서려 있었다. 나는 그 눈빛을 안다. 사업가들이 감당할 수 없는 리스크를 '비전'이라는 단어로 포장하기 시작할 때 나타나는 특유의 광기다.
"우리 회사, 이제 큰 결단을 하나 내려야 할 시점인 것 같아요."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높았다. 그는 책상 위에 놓인 태블릿을 내 쪽으로 밀어 보였다. 화면 속에는 화려한 원색의 캐릭터들이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모바일 게임 광고가 흐르고 있었다.
"B2C 쪽으로 가보려고 합니다. 모바일 게임 쪽으로 '피봇(Pivot)'을 결정했어요."
순간, 정적이 흘렀다. 내 머릿속에서는 지난 5년간 우리가 쌓아온 공공기관 SI(시스템 통합) 사업의 궤적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입찰 공고를 분석하고, 수천 페이지의 제안서를 쓰고, 까다로운 감리 대응을 하며 버텨온 시간들. 우리는 화려하진 않지만 정교한 시계태엽 같은 조직이었다. 느리지만 예측 가능한 세계, 수익률은 낮아도 현금 흐름만큼은 마르지 않는 샘물 같았던 그 세계가 박 대표의 말 한마디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대표님, 게임은 우리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입니다. SI는 정해진 규격 안에서 결과물을 내는 싸움이지만, 게임은 유저의 변덕이라는 보이지 않는 유령과 싸우는 일 아닙니까."
"강 팀장, SI는 결국 인건비 따먹기예요. 사람 늘려서 매출 늘리는 구조, 이제 한계 아닙니까? 우리도 폭발적인 성장을 하려면 이런 '업(Work)'의 전환이 필요해요."
박 대표의 말은 논리적으로는 틀리지 않았다. 다음 먹거리를 고민하는 것은 대표의 숙명이다. 하지만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방향'이 아니라 '방식'이었다.
"만약 정 하셔야겠다면, 별도 법인을 세워 '스핀오프'로 가는 게 맞습니다. 기존 SI 인력과 예산을 보존하면서, 게임 쪽은 외부 전문가를 영입해 작게 실험해보시죠. 지금 본체를 통째로 흔드는 건 피봇이 아니라 도박입니다."
내 말에 박 대표의 미간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내 제안을 '신중함'이 아닌 '겁쟁이의 변명'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스핀오프는 자원이 분산돼서 안 돼요. 우리는 지금 절박함이 필요합니다. 배수진을 쳐야죠. 이게 요즘 스타트업들이 하는 진정한 구조 전환, 피봇이라는 겁니다."
그는 '피봇'이라는 단어를 마치 마법의 주문처럼 사용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피봇은 축이 되는 발(Core)을 땅에 단단히 고정하고 다른 발을 움직여 방향을 트는 동작이다. 지금 박 대표가 하려는 짓은 축이 되는 발까지 땅에서 뽑아 허공으로 점프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착지 지점이 늪인지 벼랑 끝인지도 모른 채로.
"이미 게임 회사 출신 핵심 인력들 몇 명과 이야기가 끝났어요. 그들을 데려오려면 우리 회사 체질을 완전히 바꿔야 합니다."
그가 내민 이력서들에는 소위 '네임드'라 불리는 이들의 화려한 경력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들의 높은 연봉과 그들이 요구할 자유로운 문화가 우리 회사의 경직된 SI 조직과 충돌하며 일으킬 불꽃이 먼저 보였다. 10억 안팎의 자금으로 게임 개발과 마케팅을 다 감당하겠다는 그의 계산기는 이미 고장 나 있었다.
"성과가 나오기까지 최소 2~3년은 걸릴 겁니다. 그 사이 SI 프로젝트들이 흔들리면... 감당하시겠습니까?"
내 마지막 질문에 박 대표는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보았다.
"안 하면 더 위험합니다. 나는 우리 회사가 단순한 하청업체로 남길 원치 않아요."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깨달았다. 이 자리는 내 조언을 구하는 자리가 아니라, 그의 폭주에 박수를 쳐줄 관객을 찾는 자리였다는 것을. 나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반대 의견은 내 마음속 수첩에만 기록되었고, 겉으로는 침묵을 선택했다. 조직에서 리더의 확신이 광기로 변했을 때, 팀장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대표실을 나오자 반쯤 열린 문이 내 등 뒤에서 가볍게 흔들렸다. 그 문틈 사이로 조금 전까지 내가 가졌던 안정감이 소리 없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사무실로 돌아와 앉아 있는 팀원들의 뒤통수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일'은 여전히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우리가 믿어왔던 '업'의 기반은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준비되지 않은 도전은 성장이 아니라 균열을 만든다. 그리고 그 균열은 가장 약한 고리부터 파고들기 마련이다. 창가에 비친 내 얼굴은 벌써부터 다가올 폭풍을 예감한 항해사처럼 창백해져 있었다. 이것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조난의 시작임을, 그때의 나는 막연하게만 느끼고 있었다.
[경영 수업 제1강] 스핀오프(Spin-off) vs 피봇(Pivot)
넥스트데이터가 마주한 비극은 단어의 오해에서 시작됩니다. 많은 경영자가 위기 탈출의 수단으로 '피봇'을 선택하지만, 실제로는 '도박'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ㅇ스핀오프(Spin-off): 기존 사업의 안정성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가진 프로젝트를 분리하여 독립시키는 것. 본체의 리스크를 최소화하면서 실험을 지속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있는 도전'입니다.
ㅇ피봇(Pivot): 중심축(Core)은 유지하되 사업의 방향이나 비즈니스 모델을 전환하는 것. 축이 흔들리면 피봇이 아니라 '전복'이 됩니다.
피봇은 방향 전환이지 구조 파괴가 아닙니다. 조직의 DNA와 전혀 다른 분야로의 급격한 전환을 피봇이라고 할수 없습니다. 그것은 전략이 아니라 절박함이 낳은 실책일 뿐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이 사업(모바일게임)을 기존 조직에서 분리 또는 분사해야 할까요(스핀오프), 아니면 본업의 시너지를 도모하면서 함께 가야할까요(피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