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팀장, 스타트업 대표로 살아남기 (12)
테헤란로의 고층 빌딩 숲은 여전히 분주했다. 넥스트데이터의 사옥 앞에 서자, 불과 몇 달 전까지 이곳에서 팀장으로 전장을 누비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3층으로 가는 계단이 줄어들수록 내 심박수도 함께 빨라졌다. 최 교수님의 연구실이 고요한 성소(Sanctuary)였다면, 이곳은 피 냄새 진동하는 전장이었다.
"어이, 강 팀장. 아니, 이제 강 대표라고 불러야 하나?"
박 대표의 방은 예전 그대로였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모니터에는 게임 동접자 수와 서버 상태를 알리는 그래프들이 실시간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독한 에스프레소를 들이켜며 나를 훑어봤다. 그 매서운 눈빛 앞에 서자, 준비해온 지분 구조와 사업 계획서가 갑자기 초라하게 느껴졌다. 나는 어렵게 입을 뗐다.
"대표님... 사실 오늘 멘토링을 구하러 오긴 했지만, 그전에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었습니다."
나는 허리를 숙여 깊게 인사했다.
"갑작스럽게 회사를 떠나 심려를 끼쳐드린 점,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저를 믿고 팀장을 맡겨주셨는데, 제 꿈을 쫓겠다고 무책임하게 배를 갈아탄 것 같아 늘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정적이 흘렀다. 박 대표는 잔을 내려놓고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 비웃음이나 호통이 터져 나올 거라 예상했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배신? 강 대표, 너는 나를 너무 작게 보는군. 네가 내 밑에서 평생 팀장이나 하고 있었다면, 그게 나한테는 더 큰 배신이야. 인재를 키워냈는데 그릇이 거기서 멈춘 거니까. 네가 나가서 네 판을 짜겠다고 했을 때, 사실 속으로는 '드디어 이 녀석이 철이 들었구나' 싶었다."
그는 서랍에서 낡은 수첩 하나를 꺼내 던졌다. 그가 창업 초기에 썼던 경영 일지였다. 수첩에는 빼곡히 직원들에 대한 박 대표의 애정이 담겨있었다.
"미안해할 거 없어. 대신, 나간 놈이 빌빌거리고 있으면 그건 용서 못 한다. 자, 네가 가져온 그 '가족 놀이' 같은 지분 구조 좀 보자."
나는 조심스럽게 최 교수님과 정리했던 주주간 계약서 초안과 82%의 지분 구조, 그리고 현재 MiriBook의 진행 상황을 설명했다. 박 대표는 내 설명을 듣는 내내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남은 런웨이는?" 박 대표가 물었다.
"제 퇴직금으로 팀원들 인건비와 운영비를 감당하며 6개월의 런웨이를 확보했습니다만.."라고 말하는 순간, 그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강 대표, 너 여전히 '착한 리더' 콤플렉스 못 버렸구나?"
그의 첫마디는 위로가 아니라 날카로운 비수였다.
"내 돈 털어서 애들 월급 주고, 7시에 기어 나와서 자리 지키면 애들이 감동해서 목숨 걸고 뛸 것 같지? 착각하지 마. 그건 경영이 아니라 '자선 사업'이야. 네가 지금 하고 있는 건 리더십이 아니라 '돈으로 사는 충성'일 뿐이라고."
"하지만 대표님, 초기 멤버들이 생계 걱정 없이 제품에만 집중하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제가 리스크를 다 짊어지는 게 대표의 도리라고 생각했고요."
박 대표가 에스프레소 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도리? 웃기지 마라. 비즈니스에서 가장 무책임한 게 뭔지 알아? '지속 불가능한 호의'를 베푸는 거야. 네 퇴직금 얼마나 간다고? 다음엔 대출? 그것도 떨어지면? 그때도 애들이 지금처럼 웃으면서 9시에 출근할 것 같아? 아니, 그들은 네가 돈을 못 주는 순간 너를 '무능한 사기꾼'으로 정의하고 떠날 거다. 그게 시장의 생리야."
그는 화이트보드로 걸어가 거친 필치로 'SYSTEM'이라고 적었다.
"네가 7시에 나오는 거, 그거 사실 네 불안함 때문이잖아. 애들이 9시에 오는 게 꼴 보기 싫은 건, 네가 애들을 믿지 못하거나 애들이 너를 믿게 만들 '시스템'이 없기 때문이야. 네 지분이 82%면 그 숫자와 자리에 걸맞은 '공포'와 '희망'을 동시에 줘야지. 계약서에 사인하는 건 시작일 뿐이야. 그 숫자가 힘을 가지려면, 네가 없어도 회사가 돌아가는 '구조'를 짜야 해."
"시스템... 말씀이십니까?"
"그래. 인건비를 주는 건 당연한 의무지 훈장이 아니야. 네가 진짜 리더라면, 애들이 9시에 오든 10시에 오든 '성과로 증명하지 않으면 내 지분 가치가 쓰레기가 된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만들어야 해. 82%를 네가 가진 건, 투자를 받기 위한 방패이기도 하지만 '이 회사가 망하면 가장 크게 파멸할 사람이 나'라는 걸 보여주는 배수진이어야 한다고."
박 대표는 내 계약서 초안을 손가락으로 튕기며 말을 이었다.
"지분 3~5% 주는 거? 좋아. 근데 그게 '선물'이 되게 하지 마. '전리품'이 되게 만들어. 이번 대산출판사 계약 따내면 1%, 매출 얼마 달성하면 스톡옵션 몇 프로... 이런 식으로 그들이 스스로 자기 몸값을 증명하게 해. 그래야 네가 7시에 나와서 애들 출근 시간 체크하는 옹졸한 짓 안 하게 된다."
나는 뒤통수를 세게 얻맞은 기분이었다. 최 교수님이 '관계의 정의'를 알려주었다면, 박 대표는 '관계의 역학'을 뼈저리게 가르쳐주고 있었다. 내가 7시에 느끼던 그 고독은 리더의 숙명이 아니라, 시스템을 짜지 못한 무능의 증거였다.
"강 대표, 명심해. 리더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 '이기는 사람'이어야 해. 네가 이겨야 네 밑에 있는 애들도 먹고살고, 네가 준 그 지분이 강남 아파트 한 채 값이 되는 거야. 졌는데 착하기만 한 리더? 그건 재앙이다."
박 대표의 방을 나오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하지만 마음속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했다. 나는 오피스텔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팀원들에게 보낼 메시지를 수정했다. 단순히 "우리 열심히 하자"는 격려가 아니었다. 각자의 R&R(역할과 책임)을 기반으로 한 구체적인 KPI(핵심성과지표)와, 그 성과가 지분 가치와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한 냉정한 설계도를 머릿속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다음날 오전 7시. 여전히 나는 사무실에 있다. 하지만 이제는 시계를 보며 팀원들을 기다리지 않았다. 나는 박 대표가 말한 '이기는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대산출판사에게 보낼 제안서의 데이터를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박 대표님, 당신이 가르쳐준 그 지독한 현실 감각을 이제 제 방식대로 소화해 보겠습니다.'
강 대표는 두명의 멘토를 만나면서 성장하고 있습니다. 최교수는 '성장하는 법'을, 박대표는 '살아남는 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눠보자면 최교수는 이론형, 박대표는 현장형 멘토입니다.
이들은 의사결정의 방법도 실패를 해석하는 과정도 다를수 있습니다. 우열의 관계가 아니고 각각 장단점이 있죠. 문제는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해도 필요한 곳에 쓰일때만 효력을 낸다는 것입니다.
기업의 상황, 성장 속도에 맞춰 적절한 조언을 받되 아래 내용을 꼭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이론형 멘토: 인력, 자본 등 현실적 리소스나 문제의 난이도를 과소평가하기도 함. 이렇게 해야한다는 당위적 조언이 될 수 있음.
- 현장형 멘토: 특정 영역, 상황에 국한된 조언, 결과 만능으로 흐르기도 함. "내가 해봤다"가 과도한 권위로 작용할 수 있음.
가장 위험한 것은 한쪽의 말만을 맹신하는 것입니다. 이론형 멘토를 통해 선택지를 넓히고 현장형 멘토에게서는 '안되는 이유'를 검증받는다면 좋은 선택이 될 것입니다. 판단과 결정은 대표의 몫입니다.
당신은: 현장형 멘토와 이론형 멘토의 조언이 정반대일 경우 어느쪽 조언을 받아 들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