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오늘 몇 명의 동료가 짐을 쌌다.
인사를 나누는 그 짧은 시간이 묘하게 길게 느껴졌다. 능력 있고 성실한 사람들이었다. 함께 일하는 동안 한 번도 실망시킨 적 없는 이들이었다. 그래서 더 아쉬웠다. 그래서 더 서운했다. 그리고 그 서운함의 끝에서, 나는 오래된 질문 하나와 다시 마주쳤다.
좋은 의도는, 좋은 결과를 보장하는가.
탈무드에는 흥미로운 법이 하나 있다.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 이른바 '쉐미타(Shemitah)'가 되면 모든 빚을 전액 탕감하도록 강제하는 규정이다. 약자를 향한 시선이 담긴 법이다. 빚의 굴레에서 영원히 헤어나오지 못하는 채무자를 구제하겠다는, 분명히 따뜻한 마음에서 출발한 규정이다.
그런데 현실은 반대로 흘렀다.
채권자들은 안식년이 다가올수록 더 급해졌다. 탕감 기한이 가까워질수록 빚을 회수하려는 압박은 더 거칠어졌다. 오히려 안식년이 없었다면 느긋하게 기다렸을 채권자가, 기한이라는 칼날을 손에 쥐고 채무자의 목을 더 세게 조르게 된 것이다. 구제하려던 법이, 더 가혹한 추심의 빌미가 되었다.
기원전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비정규직 보호법도 같은 자리에 서 있다.
2년이 지나면 정규직으로 전환하도록 하겠다는 취지였다. 불안정한 고용의 사다리를 끊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안정적인 발판을 마련해주겠다는 선의였다. 그 선의를 의심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현장에서 벌어진 일은 달랐다.
사용자들은 2년이 차기 직전, 계약 해지의 빌미를 찾기 시작했다. 정규직 전환의 의무가 발생하기 직전에 관계를 끊는 것이 더 '합리적인' 선택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2년을 채우면 정규직이 되는 것이 아니라, 2년이 되기 전에 자리를 잃게 되는 역설. 보호하려던 법이, 오히려 해고의 시계를 만들어버린 셈이다.
오늘 짐을 싸고 나간 동료들도, 그 시계가 멈추는 날 자리를 떠났다.
경제학자들은 이것을 '의도하지 않은 결과(Unintended Consequences)'라고 부른다. 19세기 사회학자 로버트 머튼이 체계화한 개념이지만, 현상 자체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좋은 의도로 설계된 정책이, 예상치 못한 경로를 통해 오히려 해악을 키우는 일. 인간의 이성이 얼마나 자주, 현실의 복잡성 앞에서 무릎을 꿇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문제는 단순히 법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법을 만드는 사람들이 불순하다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인간이 설계하는 모든 시스템에는 반드시 '사람'이 개입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사람은, 주어진 조건 안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법이 새로운 규칙을 만들면, 사람들은 그 규칙의 틈을 찾는다. 선의가 구조를 바꾸면, 이해관계가 그 구조를 다시 비튼다.
좋은 의도만으로 좋은 세상을 만들 수는 없다는 것. 선의는 출발점이지, 목적지가 아니라는 것. 법과 제도를 설계할 때, 우리는 인간이 그 안에서 어떻게 움직일지를 함께 상상해야 한다. 규범이 아닌 현실을, 당위가 아닌 유인을 들여다봐야 한다.
안식년의 취지를 살리면서도 채무자를 보호했던 것은, 결국 힐렐 대법관의 '프로즈불(Prozbul)'이라는 법적 장치였다. 탕감 규정의 역효과를 인식하고, 현실에 맞게 제도를 다듬은 결과였다. 좋은 의도가 좋은 결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관찰과 수정이 뒤따라야 한다는 교훈이다.
오늘 떠난 동료들은 아마 잘 해낼 것이다. 그 성실함과 능력이라면, 어디에서든 제 자리를 찾을 것이다. 그래서 덜 걱정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상황이 괜찮은 것은 아니다. 누군가 좋은 의도로 만든 제도가, 결국 좋은 사람들을 내보내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나는 그들의 빈 자리 앞에서 한참을 서있었다.
(2024.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