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퇴근 시간, 차창 밖으로 저무는 노을을 보며 문득 '나이 듦'의 무게를 느낍니다. 흔히 나이가 들면 마음이 넓어지고 사소한 일에는 허허실실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고들 하지만, 실제로는 반대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오히려 젊었을 땐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타인의 무심함에 마음 한구석이 툭 하고 걸려 넘어지곤 합니다.
얼마 전, 동네에서 가끔 골프를 치며 시간을 보내던 후배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형님, 20만 원만 빌려주세요. 일주일 뒤에 바로 갚겠습니다."라는 짧은 톡이었습니다. 큰돈도 아니었고, 평소 안면이 있던 사이라 두말없이 송금 버튼을 눌렀습니다. '못 받아도 그만'이라는 담담한 마음으로 보낸 것이었지만, 정작 마음을 흔든 건 돈의 액수가 아니었습니다. "보냈습니다"라는 내 메시지에 돌아오는 대답 한 줄, 아니 이모티콘 하나조차 없던 그 적막함이었습니다. 순간 '혹시 피싱인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 정도로 차가운 무반응이었습니다.
약속한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마침 추석 명절 앞이라 바빠서 그러려니 하며 다시 일주일을 더 기다렸습니다. 조심스레 "혹시 보냈는가?"라고 안부를 묻듯 메시지를 던지자, 며칠 뒤에 돈이 들어오니 그때 보내겠다는 짧은 답장이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미안하다는 사과나 기다려줘서 고맙다는 살가운 표현은 한마디도 없었습니다.
그 순간, 가슴 한편에 묘한 서운함이 번졌습니다. 빚 독촉을 하려던 것이 아니라, 혹여나 후배가 돈 때문에 마음이 상하거나 미안해할까 봐 최대한 말을 고르고 골라 조심스럽게 꺼낸 질문이었기 때문입니다. 빌려준 사람보다 빌린 사람의 마음을 더 헤아리려 애썼던 배려가 무색하게 돌아온 무미건조한 반응에 속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요즘 세대의 소통 방식은 원래 이토록 효율적이고 간결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감정의 과잉을 피하고 용건만 간단히 주고받는 것이 그들만의 예의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형님'이라 부르며 다가왔던 관계의 온도를 떠올리면, 그 한 문장의 부재가 못내 아쉽습니다.
결국 이 서운함은 상대방의 잘못이라기보다, 내가 나이를 먹으며 기대하는 온도가 세상과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 탓일 겁니다. 서운함이 많아진다는 건 그만큼 사람 사이의 정과 예의를 여전히 소중히 여긴다는 증거이기도 하겠지요.
"암만, 내가 나이 먹은 탓이지"라며 스스로를 달래 봅니다. 오늘 하루의 고단함과 함께 이 씁쓸한 마음도 차창 밖으로 흘려보내며, 익숙한 집으로 향하는 퇴근길에 오릅니다.
(2024.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