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의 주변인들에게
백수로 지내면서 제일 듣기 싫은 말은 "취업해라"가 아니라
"넌 집에서 노니까 좋겠다"였다.
보통 생각 없이 하는 말인데 듣는 백수 입장에선 꽤나 상처가 되는 말이었다.
나는 놀아도 정신적으로 편안하지가 않다고 그렇게 말해도 어차피 "난 하루라도 놀고 싶어"라고 말하는 입장에선 와닿지 않는 말이고 엄청나게 힘든 회사의 스트레스와 업무에 찌들어서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 나도 사람인지라 이게 관용이 가능한 날이 있고 스스로 자기혐오에 빠졌을 땐 이런말조차 나를 비난하는 느낌이 들어서 화가 났다.
직장 다니는 사람의 고민이라고 크고 취준생의 고민이라고 작을까
고민의 무게는 다 자기 것만 뻥튀기 되어서 세상에서 제일 크게 느껴진다.
겨울이면 춥다고 나가기 싫다고 여름이면 덥다고 나가기 싫다고
야근이면 야근 회식이면 회식이 싫다는 말이 나는 부러웠다.
그리고 왜 이런 못난 감정을 느끼고 있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어쨌든 집에서 늦잠자고 일어나고 뒹굴뒹굴거리니까 꽤나 여유로운(?)삶으로 보이긴 할거같다.
출퇴근하고 고생하는 그들보다는 좀 쉬운거 같기도 하다.
근데 백수와 직장인의 가장 큰 차이는 그래도 뭔가 사회에서 쓰이고 있다는 것과 잉여로 있다는 불안감차이 아닐까...
물론 직장인도 이 직장이 평생직장인지 미래에 대한 걱정과 이직과 퇴사 걱정을 한다.
그런데 백수는 그런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취업은 할 수 있나?'라는 생각을 한다.
가끔 사회에서 내가 쓸모 없어서 방출된게 아닌가 나만 빼고 돌아가나 라는 심각한 왕따의 마음을 느끼기도 한다.
주위에 백수 친구가 있는데 애가 너무 날카롭고 우울해요. 불러도 잘 나오지도 않아요
우연히 이런 인터넷 글 보고 내 친구가 쓴 얘긴줄 알았다.
남자친구 생긴 친구가 모태솔로 친구 앞에서 열심히 남친자랑만 하는거랑 비슷하다.
애키우는 애기엄마가 미혼인 친구들이랑 공감대랑 대화 화제가 없으면 지역맘 카페에 가서 비슷한 상황의 엄마들과 만나서 친구가 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다.
들어주는 것도 친구니까, 그것이 의무라고 한다면 할말이 없지만 공감대가 줄어들면 자연스레 만남도 피하게 되고 대화도 줄어든다.
그렇다고 아예 친구가 아닌 것은 아니다.
어쨌든 섬세한 백수의 주변인들에게 얘네를 대체 어떻게 대하면 좋겠느냐는 질문에 해주고 싶은 말은 적당히 그냥 생존확인만 해주면 된다.
취업했니 뭐해라 이런 오지랖도 안달갑지만 만나서 너무 회사얘기만 하는 것도 나같은 사람한텐 그다지 들어줄 수 있는 얘기도 아니다.
만약 백수 친구가 부르고 불러도 그렇게 안나온다면 얘가 너무나 땅굴을 파서 지금은 어두컴컴한 시기이거나 만나서 내가 너무 내 얘기의 공감대1도 없는 얘기만 했을 수도 있다.
땅굴은 기다리면 두더지마냥 쏙 햇빛 보러 나올 수 있지만 후자일 경우는 계속되면 인맥이 끊긴다.
나는 그냥 나만의 언어로 '무심한 폭력'이라고 부르는 행동이 있다.
너무 사소하고 쪼잔해서 친구들에겐 말하지 않고 그냥 듣고 넘기고 말지만
어쨌든 은연중에 백조를 동정하는 발언(그래도 난 그나마 취업했지만 아직도 못했으면..어쩔뻔), 굳~이 나랑 만나서 직장 얘기만 줄창하거나, 특히 여자 나이 후려치기 발언(여자 몇살 신입이면 이제 시집이나 가야지뭐...가능성없지...)등등이 있다.
백조를 만났을 때 근황을 묻는 정도는 좋지만 저런건 좀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백수 이전에 그냥 사람대사람으로 친해진건데 공감대 없어서 답답한건 아마 취준생이 더할거 같다.
물론 모든 취준생이 이렇지는 않다.
직장얘기 듣고 자극받아서 열심히 하는 취준생이 있을 수도 있다.
("니 직장얘기 좀 더해봐 흥미롭다"라고 말하는 취준생이 있다면 해주면 되지만 그거 아니면 안물안궁이니까 말 안해줘도 된다.....)
적어도 나는 내가 동기부여가 안돼면 전혀 움직이기 않기 때문에 별로 듣고 싶지 않다.
내 걱정은 고맙지만 그건 내가 할게라는 마음이다.
그렇다고 나 때문에 니 직장얘기만 쏙쏙 피해서 안해달란 이기적인 부탁은 하지도 않는다.
그치만 위에 말한 몇몇 발언은 입장 바꿔서 들어보고 내가 들었을때 기분 나쁘거나 싸가지 없다는 생각이 안들면 해도 되는 말이지만 아닐 경우엔 안하는게 맞다.
친구가 자기 힘든 얘기라고 우연히 말하다 "그래도 내가 아직도 알바나 하고 취직 못했으면 어쩔뻔 했어"라는 말을 듣고 나서 나는 한동안 벙쪘었다.
나름 친하다고 생각했고 걔가 그런식으로 생각하고 있을 거란 생각은 못했다.
나에게는 알바라도 하는 건 어떠냐고 말했고 나름 내 걱정을 해주고 있는 친구라고 생각했었다.
내심 나를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우위에 있었구나. 누군가의 위안이 되주고 있었구나 라는 사실에 엄청나게 상처 받았다.
그 친구는 가해자기 때문에 자기가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조차 기억 못하겠지만 내 안에 아마 평생동안 그 말은 남을 것이다. 꽤 친한 친구였는데도 말이다.
그날 이후로 어차피 남은 남이라는 생각이 깊게 자리잡아서 힘든 기분을 친구들에게 쉽게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 힘들 때 옆에서 하는 날카로운 말이 평생 남을 수 있다는 것을, 그 관계에서 돌이킬 수 없는 무언가가 된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지금 힘든 직장인들도 취준생인 시절이 있었을테니까
그리고 나중에 상황이 바뀌어 내가 일을 하게 되더라도 취준하는 친구들을 훨씬 더 섬세하게 대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