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을 믿었던 그때, 이미 시작된 분열
“○○이가 아빠를 많이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아빠에 대한 그리움이 큰 만큼 어머니에 대한 반항심도 커지고요.
아빠와 정기적으로 만남을 가지면 아무래도 ○○이의 정서 안정에 도움이 될 듯싶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애써 봉인해 두었던 이름 하나가 다시 떠올랐다.
아들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ADHD 증상이 더 심해졌다.
민감도가 높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효과적인 치료를 위해 상담 선생님께서는 아빠와의 정기적인 만남을 제안했다.
전 남편과는 두 번 다시 얽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부자간의 천륜을 막을 수는 없었다.
3년 만에 여전히 눈에 익은 전화번호를 눌렀다.
통화 연결음이 울리는 짧은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이 아빠는 헤어진 후에도 양육비를 주기는커녕,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라며 천만 원만 빌려 달라고 집까지 찾아왔었다.
행여 소란을 피울까 조마조마했다.
고층에서 힐끗 내려다보았는데도 아파트 벤치에 앉아 줄담배를 피우는
그의 침울한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결국 그는 포기한 듯 천천히 자리를 떴고,
그 이후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전 남편은 호텔 판촉 부서에서 근무할 때 처음 만났다.
인사부 직원과 함께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주뼛주뼛 사무실에 들어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조용조용했고, 존재감도 거의 없었다.
그때 나는 결혼을 재촉하는 남자친구 때문에 갈팡질팡 고민 중이었다.
업무적으로도 슬럼프를 겪고 있던 터라
결국 회사를 그만두고 도피성 짙은 영국 어학연수를 떠났다.
1년 뒤, 함께 일하던 과장님의 권유로 다시 호텔에 입사했다.
출근 첫날, 나를 보자마자 호탕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그를 보고
순간 어리둥절했다.
예전의 소심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윗분들께는 싹싹했고,
동료들 사이에서는 유머 감각과 리더십이 돋보였다.
집 방향이 같아 그가 종종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었고,
자연스레 가까워졌다.
개그 프로그램을 사랑하던 나는
대화가 통하고 함께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좋았다.
그와 함께 있으면 늘 즐거웠고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남자 직원들은 틈만 나면 우리를 엮으려 했지만,
가깝게 지내던 언니들은
동료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역시 여자의 촉은 무섭다.
그들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그가 정식으로 데이트를 신청했을 때
며칠을 고민하다 결국 승낙하고 말았다.
차근차근 시간을 두고 만나 보다가
아니다 싶으면 그만두면 된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하지만 나이가 발목을 잡았다.
당시 내 나이 스물아홉, 그는 서른셋.
혼기가 꽉 찬 결혼 적령기의 처녀 총각이었다.
그의 가족들과 가볍게 밥 한 끼를 먹었을 뿐인데
“네 살 차이는 궁합도 안 본다”는 말과 함께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아, 이게 아닌데….’
불안했지만,
그 불안이 나를 보호해 줄 신호라는 걸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본격적으로 결혼 준비를 하면서부터
하나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묻지도 않았는데
부모님이 아파트 한 채를 사 주실 거라며 호언장담했다.
예물을 고를 때도 값비싼 브랜드만 고집했다.
시아버님이 30년 넘게 치과를 운영하고 계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나 보다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허풍이었다.
시댁은 대출받아 구한 작은 신혼집의
인테리어 비용조차 감당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자식이 생기면 조금은 정신을 차리지 않을까 싶어
생기지도 않는 아이를
인공수정 두 번째 만에 어렵게 가졌다.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은 기대였지만,
그때의 나는 가정을 붙잡을 마지막 끈이 필요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너무나도 귀한 생명이었다.
그러나 그의 대책 없는 낭비벽과
왜곡된 경제관념은 변하지 않았다.
결혼 후 객실 부서로 옮겨
만삭이 될 때까지 일했지만
가정 경제는 늘 파탄 상태였다.
그의 월급은 물론
내가 번 돈까지 카드빚을 갚는 데 모두 들어갔다.
그것도 모자라
내 마이너스 통장마저 그의 차지가 되어 버렸다.
한 공간에서 계속 싸우며
불편한 관계로 지내는 것이 견딜 수 없어
여러 차례 눈물로 간곡히 호소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는 어느 날 의논 한마디 없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전 직장 사람들과 동업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경기가 급격히 악화되며
호텔, 숙박, 항공 등
여행업 전반이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야근을 핑계로
연락도 없이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잦아졌다.
혹시나 했는데,
결국 여자 문제까지 터지고 말았다.
참혹한 현실 앞에서
몸도 마음도 완전히 황폐해져
더 이상 결혼 생활을 이어갈 수 없었다.
출가한 동생은 물리적으로 너무 멀었고,
믿었던 아빠는
잘못된 선택에 대한 날 선 비난을 멈추지 않으셨다.
이럴 때 엄마가 계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우리 엄마만 살아 계셨다면
나는 진작에 이혼했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를수록
엄마의 부재는 뼛속 깊이 사무쳤다.
아들을 굳게 믿고 계시던 시부모님은
이혼을 간곡히 만류하셨다.
하지만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차분히 사실대로 말씀드리자
그분들도 더는 붙잡지 않으셨다.
아이 아빠와는
아침 드라마 속 진흙탕 싸움 없이
깔끔하게 합의 이혼을 했고,
남매둥이의 양육권도 지켜냈다.
마침내 악연의 고리를 끊어냈다고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잔잔해진 듯 보이는 바다에,
또 한 차례 무시무시한 태풍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