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산을 본 것 같았다.

by 힘날세상


이상하게도 내가 사는 데서는 / 새벽녘이면 산들이 / 학처럼 날개를 쭉 펴고 날아와서는 / 종일토록 먹도 않고 말도 않고 엎댔다가는 / 해 질 무렵이면 기러기처럼 날아서 / 틀만 남겨 놓고 먼 산속으로 간다


산은 날아도 새 둥지나 꽃잎 하나 다치지 않고 / 짐승들의 굴 속에서도 / 흙 한 줌 돌 한 개 들성거리지 않는다 / 새나 벌레나 짐승들이 놀랄까 봐 / 지구처럼 부동의 자세로 떠간다 / 그럴 때면 새나 짐승들은 / 기분 좋게 엎대서 / 사람처럼 날아가는 꿈을 꾼다


산이 날 것을 미리 알고 사람들이 달아나면 / 언제나 사람보다 앞서 가다가도 / 고달프면 쉬란 듯이 정답게 서서 / 사람이 오기를 기다려 같이 간다


산은 양지바른 쪽에 사람을 묻고 / 높은 꼭대기에 신(神)을 뫼신다


산은 사람들과 친하고 싶어서 / 기슭을 끌고 마을에 들어오다가도 / 사람 사는 꼴이 어수선하면 / 달팽이처럼 대가리를 들고 슬슬 기어서 / 도로 험한 봉우리로 올라간다


산은 나무를 기르는 법으로 / 벼랑에 오르지 못하는 법으로 / 사람을 다스린다


산은 울적하면 솟아서 봉우리가 되고 / 물소리를 듣고 싶으면 내려와 깊은 계곡이 된다


산은 한 번 신경질을 되게 내야만 / 고산도 되고 명산도 된다


산은 언제나 기슭에 봄이 먼저 오지만 / 조금만 올라가면 여름이 머물고 있어서 / 한 기슭인데 두 계절을 / 사이좋게 지니고 산다



1968년 창작과 비평에 발표한 김광섭 시인의 <산>이라는 시이다. 산을 주제나 소재로 쓴 시는 참 많다. 그러나 이 시는 산을 의인화하여 바람직한 인간의 삶을 노래하고 있다. 여기에서 ‘산’을 ‘사람’으로 바꾸기만 하면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참 쉬우면서도 명쾌하게 다가오는 시이다.


산에 갈 때마다 이 시를 읊조리며 걷는다. 산처럼 살겠다고 늘 다짐하고, 산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겠다고 스스로 약속을 한다. 그러나 나는 어느덧 탐욕에 젖어 있고, 아전인수격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산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는 늘 부족한 것이다.


시인은 ‘산은 나무를 기르는 법’으로 사람을 다스린다고 말한다. 산이 나무를 기르는 법은 지극히 간단하다. 그냥 품에 안고 있어 주는 것이다. 나무가 빽빽하게 밀려 들어오면 들어오는 대로, 소나무와 참나무가 뒤섞여 자리 잡으면 잡는 대로 산은 그냥 받아들인다. 바람이 나무를 통째로 흔들어도 산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만히 있다.


산이 산이 되는 이유이다. ‘새나 벌레나 짐승들이 놀랄까 봐’ 산은 ‘지구처럼 부동의 자세’로 서서 참고 견딘다. 희생이다.


늘 산길을 걸었다. 짙고 두껍게 하늘을 가려, 사람이 걸어야 할 길을 다듬어 놓는 산에서 마음이 씻기는 즐거움을 즐겼다. 김광섭 시인은 그러한 산을 노래했고, 산은 김광섭 시인 그려놓은 산을 그대로 보여줬다. 나무는 숲을 이루고, 숲은 모이고 모여서 산이 된다. 그러나 내가 본 것은 산이 아니라 숲이었고, 나란히 나란히 서 있는 나무였다. 그런데도 나는 산을 보지 못했다.


산에서 산을 볼 수 있으면 제대로 산을 걸은 것이다. 나무를 보고, 나무들이 모여 숲을 이루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산을 제대로 걸은 것은 아니다. 산에 들어 있으면서 산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산에서 산을 볼 수 있어야 김광림 시인이 말하는 ‘면벽(面壁)한 노승(老僧) 눈매’에 떠오르는 미소(微笑)’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김소월 시인이 되어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는 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산을 볼 수 있으면 왜 꽃이 저만치 혼자서 피어야 하는지를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는 산을 하나하나 숨을 불어넣어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다. 시는 걸음을 산으로 이끌고, 산을 보여 준다. 숲이 깊어질 때마다 시구(詩句)가 이어지는 것이다.


비가 멈춘 날, 광덕산 능선에서 쌓여 있는 고요를 만났다. 나까지 고요에 매몰될 듯한 시간에 붙잡혀 멍한 눈으로 꼭대기에서 마을로 달려 내려가는 산자락을 보았다. 그러나 산은 움직이지 않았고, 나 또한 발길을 옮기지 못했다. 진초록의 산자락을 온새미로 덮어 말갛게 말갛게 씻어내고 있는 햇발을 보았다. 나무를 씻고, 숲을 씻고 있는 햇발을 보았다. ‘한 기슭인데 두 계절을 사이좋게 지니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는 원추리 노란 꽃을 보았던 것 같았다. 산을 본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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