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창窓

세상으로 향한

by 힘날세상


벌써 두 시간째, 빗줄기가 흘러내리는 창을 바라보고 있다. 빗줄기는 굵어졌다가 가늘어지길 반복하며, 여름 장맛비의 이야기를 그린다. 창을 타고 흐르는 빗줄기는 언제나 아래로만 흘러내리지는 않는다. 흘러내리다가 제 기분에 따라 옆으로 튀어 나가기도 한다. 빗줄기멍이라고 해야 할까.


‘극한 호우’라고 해도 흘러내리는 빗줄기나, 하늘부터 땅바닥에 무수하게 내려 꽂히는 빗기둥이라고 해도 창을 타고 넘는 시선을 완전하게 가로막지는 못한다. 빗줄기 너머에 펼쳐져 있는 세상은 희미하지만 내 마음으로 들어온다. 느긋한 오후의 시간들이 그려내는 편안함이며, 눅진눅진하게 버무려진 그리움은 막아서지 못한다. 모두 다 창을 넘어 들어온다. 뜨거운 아메리카노의 향은 흔해 빠졌을지라도 윤이 난다.


창窓을 하나 가지고 싶다. 햇살이 가득히 내려앉는 창. 어둠이 내리기 직전, 하늘을 곱게 물들이는 황혼이 아름답게 들이비치는 창을 하나 가지고 싶다.


지금은 빗방울이 흐르고 있지만, 말간 햇살이 주렁주렁 열리고 투명한 바람이 걸리기도 할 것이다. 그때 얼른 창을 열어야 한다. 그때는 세상이 열릴 것이고, 빗줄기에 차여 저 멀리까지 물러나 버린 둥그레 한 산등성이도 기쁜 마음으로 허위허위 걸음 할 것이다. 놀이터를 가득 메운 아이들의 천연덕스런 웃음소리도 아무렇지도 않게 이 높은 곳까지 한달음에 뛰어 올라올 것이다. 틀림없이. 그때, 얼른 창을 열어야 한다.


지난가을이었다. 낙엽이 휑하니 떨어지고 있을 무렵, 시골길을 걷다가 아주 작은 카페에 들어갔다. 창가에 놓여 있는 2인용 탁자에 내려앉는 햇살이 참 곱다. 머리는 백발이고 얼굴에는 주름이 깊게 파인 늙은 부부가 앉아 있다. 노트를 들어 무엇인가 쓰고 있는 아내와, 찻잔을 손에 들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남편의 실루엣이 평화롭다. 노부부에게로 향한 나의 시선은 못 박은 듯 딱 고정되었다. 시선을 거두어들이기에는 노부부의 얼굴이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생을 내려놓을 때가 가까워진 노부부에게서 어떻게 행복이 묻어날까. 어깨는 꾸부정하고 살이 다 빠져나간 손등은 저렇게 푸석하건만, 얼굴에 남아있는 저 은은한 광채는 어디서 근원하는 것일까. 늙어서 아름다워야 한다. 노부부가 서로를 마주 바라보며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받아 낼 수 있는 여유로움은 참으로 아름답지 않은가. 서두르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느긋하게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삶의 시간을 향해 편안한 마음으로 인사를 건넬 수 있어야 아름다운 노년이 아닐까. 노부부는 참으로 많은 것들을 내려놓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저렇게 창가에서 햇볕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늦은 가을날 오후의 햇살은 참 말갛고, 따스하다. 돌아서는 가을의 뒷모습을 바라보기에는 아무래도 카페의 창가가 제격이다. 들길을 걷고, 산자락을 거니는 것보다는, 잔잔한 음악이 감돌아 내리는 카페에 앉아 등을 돌리는 가을의 오후 걸음은 창 너머로 바라보아야 한다. 바람이라도 불어 나뭇가지를 흔들어대고, 낙엽이라도 흩날린다면 늙은이의 감정을 끌어내기에 더 없을 것이다.


박범신의 히말리야 등반 소설 『촐라체』를 읽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의 한 토막이다. 촐라체에 올랐는데 촐라체가 없다. 목숨을 걸고 올라선 정상에는 촐라체는 없고 허공뿐이다. 자신의 본질을 들여다보겠다고 평생을 바쳤는데 내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인생의 한 단면일까. 그렇다면 우리가 피 튀기며 살아온 인생은 어떻게 정의되어야 하는 것인가. 그냥 허망하다고 치부해도 괜찮을까.


그래서 인간의 삶은 박인환 시인의 시구처럼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창 내고자 창 내고자 이내 가슴에 창 내고자 / 고모장지 세살장지 들장지 열장지 암돌져귀 수톨져귀 크나큰 장도리로 둑닥 바가 이 내 가슴에 창내고저 / 잇다감 하 답답할 제면 여다져 볼가 하노라.


조선 시대 어떤 사람은 참 답답한 삶을 살았는가 보다. 가슴에 창을 내고 싶을 만큼 숨이 쉬어지지 않았나 보다. 그래서 이렇게 절실하게 노래하고 있을까. 창을 내는 것은 사실 참 쉬운 일일 수도 있다. 처음부터 옆에 사는 사람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일 게다.


너무 철학적이거나 문학 작품의 등장인물처럼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보편적인 삶은 아니지 않을까. 그냥 막걸리 한잔을 나누어 마시며 어울렁더울렁 얽혀서 살아야 할 것 같기는 하다. 그렇다고 근시안적으로 눈 앞엣것만 바라보며 사는 것도 적절하지 않을 것 같다. 세상을 향하여 몸을 돌리고 열린 걸음을 걸어야 한다. 시선을 멀리하고 나의 지경地境을 어느 정도는 넓혀가는 행보를 해야 한다.


창은 창틀이 있어서 창이다. 넓은 세상을 꼭 필요한 만큼만 보여주는 창틀이 있기에 창을 통해서 바라보는 세상이 아름다운 것이다. 창틀은 바라볼 수 있는 세상의 폭을 결정해 준다. 창틀은 너무 작아서도 안 되지만, 너무 커도 세상을 바라보는 창의 본분을 다하지 못한다. 늙을수록 창틀은 좁아지겠지만, 창은 세상으로 통하는 문이기에 어떠한 경우라도 닫혀서는 안 된다.


비가 물러나는 자리마다 해가 뜬다. 빗속에서도 끊임없이 얼굴을 가다듬는 해가 훌쩍 뛰어든다. 세상을 한꺼번에 드러낸다. 사람들은 창을 활짝 열어젖힌다. 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자신과 다른 세상을 흡입한다. 세상과 정을 통한다. 빗방울이 흘러내리던 창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린다.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고 여행을 하고, 집을 짓고, 책을 읽는다. 재미있다가 우울해한다. 삶의 굴곡을 따라간다.


지금은 폭우가 내려 닫아 놓았지만, 창은 햇볕을 내려놓고 해가 떨어질 때, 땅거미가 스멀스멀 기어들어 올 때, 열어두어야 한다. 소풍을 끝내는 날 노부부의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거창하게 내려올 그 붉은빛을 하나도 남김없이 받아들일 창은 꼭 열어두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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