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국수

by 힘날세상

늘 즐겨 먹는 물국수/힘날세상 사진



아내가 새콤한 비빔국수를 점심으로 내놓는다. 다섯 색깔의 국수를 정갈하게 감아올리고 싱싱한 상추를 곱게 썰어 넣고 불그스레한 양념 고추장을 오뚝이 올려놓았다. 나는 이 양념 고추장이 내가 좋아하는 농도에 딱 맞을 정도로 새콤할 것이고, 그렇게 만들기 위해 적당량의 마늘과 매실 발효액을 넣었다는 것을 안다. 양념 고추장 위에 하얀 참깨를 솔솔 뿌려 놓고, 얇게 썬 소고기 몇 점, 그리고 노랗게 부친 지단을 고명으로 올려놓았다.


국수는 화려한 고명을 올려 담백하게 말아내는 물국수가 단연 최고다. 커다란 양푼에 가득 담아 첫 입부터 볼이 터질 듯 몰아넣고 우걱우걱 먹어야 제맛이다. 새처럼 조금 먹는 아내는 그렇게 몰아넣는 나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지만, 몇 그릇의 국수를 말아내더니 받아들였다. 비빔국수보다 고명을 예쁘게 올린 물 국수를 좋아하는 것도 비슷한 시기에 인정해 주었다. 그리고 담백한 국물에 예쁜 고명을 얹어 내 입맛에 딱 맞게 말아 주었다.


70년대로 들면서 새마을 운동이 소나기구름처럼 전국에 몰아닥쳤다.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 길도 넓히'는 소위 새마을 사업은 세상을 바꾸어 버릴 듯 요란하게 펼쳐졌다. 한 집에서 두 명까지 참여할 수 있었고, 참여한 사람은 똑같이 일당을 받았다. 새마을 운동은 한 달 정도 계속되었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참여하였고, 마지막 날 그동안 참여한 일당을 한꺼번에 받았다. 받은 돈의 절반은 어머니께 드리고 남은 돈으로 구두를 샀다. 돈도 벌고 배도 부르고 정말 최고의 겨울이었고, 우리를 살리는 새마을 운동이었다.


오후 3시가 되면 동네 부녀회에서 국수를 끓여 한 그릇씩 나눠 주었다. 대량으로 끓여 내다보니까 아무런 고명도 올려져 있지 않은 국수는 손가락만 한 굵기로 불어 있었다. 그래도 군내가 심하게 나는 김치를 곁들여 울타리 밑에 선채로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한입에 욱여넣었다. 밥숟가락 놓고 돌아서면 금세 허기가 몰아치던 나이였기에 맛을 느낀다는 것은 사치였었다. 먹었다는 것이 중요했고, 배부른 것으로 그만이었다.


겨울에 심어 놓은 보리와 밀은 모내기를 하기 직전에 거두어들인다. 모내기를 하는 틈틈이 보리타작을 하게 되는데 보리까락이 목덜미에 달라붙어 여간 껄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더운 데다가 껄끄럽기까지 해서 보리타작은 이래저래 짜증이 몰려왔다. 보리타작 끝에 밀도 타작하였다. 온갖 짜증을 다 부리고 토라지면 어머니는 밀을 빻아서 국수를 삶아 준다고 우리를 달랬다.


밀자루에 멜빵을 걸어 짊어지고 어머니를 따라 기차역 옆에 있는 방앗간으로 갔다. 어머니는 가져간 밀자루를 풀어 밀가루로 빻고, 조금은 남겨 국수로 받았다. 더 달라커니 많이 주었다 커니 밀고 당기기를 하다가 방앗간 주인은 인심을 쓰듯이 국수 한 뭉치를 더 얹어 주었다.


밀가루는 아주 유용한 양식이었다. 끓는 물에 대강대강 떼어 넣어 수제비도 끓여 먹고, 비 오는 날에는 넓은 안반 위에 반죽을 올려놓고 빨랫방망이로 얇게 밀어 칼국수를 해 먹었다. 텃밭에서 따온 고추를 송송 썰어 넣어 고추장떡도 부쳐 먹었다.


나는 하얀 국수가 좋았다. 집에서 밀가루를 반죽하여 끓여주는 칼국수는 어딘지 모르게 거칠고 투박한 맛이었다. 국물 또한 밀가루가 그대로 담긴 듯이 탁했다. 나는 칼국수를 ‘구정물 국수’라고 불렀다. 그에 반해 국수는 국물이 말가서 좋았다. 지금같이 고기나 지단은 올려놓지 않았지만, 호박을 가지런히 썰어 넣고 아주 어쩌다가 달걀을 풀어서 국물을 내는 국수는 모양도 참 아름다웠다. 그러나 당시의 국수는 매일 밥을 먹기에는 쌀이 부족하기에 먹는 끼니 대용식이었다.


빗소리 때문이었을까? 아직 신혼의 달콤함이 남아 있던 주말, 제법 굵은 소리로 창문을 두드리던 빗소리를 듣고 있다가 불쑥 김치 한 가닥과 함께 길바닥에 서서 몰아넣던 국수가 떠올랐다. 아내는 손바닥만 한 부엌에서 샛노랗고 새하얀 지단을 가지런히 썰어 올리고 파릇한 대파도 몇 조각 곁들여 참 정갈하게 국수를 말아 내었다. 빗소리에 마음을 얹어 가며 참 맛난 점심을 먹었다. 국수는 그대로 밥이었다. 아니, 밥보다 더 좋은 별미였다.


백석 시인은 국수를 좋아했나 보다. 그 국수를 소박하고 친근하면서 반가운 존재라고 말하고 있다. 둘러앉아 정을 나누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장다운 고향 사람들의 은은한 즐거움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에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의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古淡하고 소박素朴한 것은 무엇인가

ㅡ 백석, <국수>에서


국수는 여럿이 먹어야 제맛이다. 그래서 국수는 잔치 음식이다. 결혼식날 파안대소를 하며 몰려온 하객들을 위해서 얼른 대접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빠른 시간에 조리할 수 있고, 적은 돈으로 마련할 수 있고, 식탁도 의자도 없이, 특별한 반찬도 없이 그릇을 손에 들고 삼삼오오 둘러앉아서 정답게 먹을 수 있는 것은 국수를 따라갈 것이 무엇일까.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르는 심심한 국물을 한 모금 들이키면 속이 확 풀리고 무거운 마음까지 가라앉는 것이 국수가 아닐까. 그래서 잔치국수라고 하는가 보다. 세상에 ‘잔치’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음식이 어디에 있는가.


이마에 주름이 생기면서 먹는 양이 눈에 띄게 줄어들면서 입맛도 확연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젊었을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떡을 집어 먹기 시작했고, 푸성귀 냄새가 싫었던 배춧잎 부침개에서도 달짝지근한 맛이 느껴졌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비빔국수의 새콤함이 입안을 휘감아 왔다.


“어째 입맛이 변했을까. 그 좋은 물 국수를 찾지 않고 비빔국수라니?”


아내는 입을 뾰로통하게 내밀면서도 새콤한 양념을 얹은 비빔국수를 내어놓았다.



나는 한 번도 국수를 말아 본 적이 없다. 요리를 못하는 까닭에 아내가 말아 주는 국수의 그윽한 맛을 흉내도 낼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나 아내가 비빔국수 양념을 만드는 것을 어깨너머로 들여다보니 어찌어찌하면 비슷하게 흉내는 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비 오는 어느 날 비빔국수를 내놓고 식탁에 마주 앉아 백석 시인의 '국수'나 같이 읽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