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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힘날세상 Oct 03. 2024

32화 손주들의 아침 밥상


엄마가 피곤한 일요일 흔한 남매의 아침 식사, 사진/10살 손녀


ㅡ할아버지, 오늘 아침은 저희가 챙겨 먹었어요.

아침부터 손녀가 전화를 했다.

ㅡ할아버지, 저는 계란 스크램블을 했고요, 누나는 프라이를 해 먹었어요.  

손자도 끼어든다.

ㅡ어째서 엄마가 안 해주고 아가들이 챙겨 먹었을까?



가끔 딸은 은근슬쩍 분위기를 잡아끌며 아이들이 자기 밥을 스스로 만들어 먹게 한다. 초등 3학년, 1학년인 손녀와 손자는 희희낙락거리며 자기들이 먹고 싶은 메뉴를 골라 소란을 피우며 저녁을 먹는다고 한다. 손자는 계란 비빔밥을 한다고 싱크대부터 인덕션, 부엌 바닥까지 어지럽히고, 손녀는 동생이 어지러 놓은 것을 치우고 닦아가며 계란 비빔밥이 묻은 팬에 자신의 밥을 볶는다.


ㅡ할아버지, 엄마가 피곤해서 오늘 아침에 일어나지 못했어요.

ㅡ엄마 수영선생님이 너무 빡세게 돌려서 그래요.

ㅡ저는 아무리 축구를 오래 해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거든요.


이 녀석들 아주 살판났다.


ㅡ할아버지, 오늘 아침 밥상 사진은 제가 찍었어요.

ㅡ누나가 그냥 찍으려고 해서 제가 도라지즙을 컵에 따라 놓았어요. 멋있죠?

ㅡ그렇구나, 울 아가들이 잘했네.

ㅡ저희는 아가들이 아니고 어린이들이라니까요.

내가 아가들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주 못마땅한 손자가 툴툴거린다.


아이들은 참 부쩍부쩍 자란다. 몸뚱이가 크는 것보다 몇 배나 빨리 마음과 생각이 커진다.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근무하는 사위는 1~ 2주 만에 아이들을 보고는 깜짝깜짝 놀란다고 한다. 아이들이 너무 빨리 크는 까닭이다. 아빠와 같이 지내지 못한다고 엄마가 쫀쫀하게 나서는 바람에 나름 계획적으로 생활하는 편이고, 책을 많이 읽다 보니 논리적으로 덤벼댄다. 한글을 일찍 깨쳐 여섯 살 언저리부터 책에 묻혀 지내는 누나와 달리, 유치원 졸업하면서 겨우 한글을 익힌 손자는 책 읽는 것을 싫어했다. 같은 반 승연이라는 여자 아이가 써준 다섯 줄짜리 러브레터를 모르는 글자가 많아 읽지 못한 손자는 일주일 만에 한글을 읽어냈다. 다 승연이 덕이다. 손자는 제 방으로 달아나 문을 닫고 괴발개발 러브레터 답장을 썼다. 받침은 다 어디로 보내버린 참 어설픈 러브레터.


승연아. 나는 네가 참 조아. 근대 엄마가 더 조아.


이를 어째야 옳아. 세상에 이런 편지를 쓰다니. 이런 마마보이를 그래도 좋다는 승연이 덕에 손자는 한글을 읽고 쓰는 속도가 빨라졌고, 철자법 또한 정확도가 향상되었다. 그 바람에 무섭게 책을 읽기 시작했다.


ㅡ할아버지, 혹시 해리포터 있어요? 있으면 저 주세요.


책을 읽겠다고 하는 게 이뻐서 책값을 보내줬다.


ㅡ할아버지, 당장 해리포터 샀어요. 고마운데 해리포터는 글자가 너무 많아 2학년 되면 읽을 거예요. 선생님과 1년에 100권 읽기로 약속했는데 벌써 다 읽었어요.


녀와 달리 손자는 제 자랑이 심하다. 그리고 승부욕도 아주 강하다. 누나보다 먼저 일어나야 하고, 누나보다 먼저 자야 한다. 욕심도 많아서 우리 집에  오면 챙겨갈 것부터 찾는다. 식당에서 주는 포장지에 싸인 물수건은 꼭 챙겨 온다.


학교는, 아니 선생님은, 유원이라는 같은  여학생은 승연이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칠 만큼 여덟 살 손자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온갖 멋을 부리기 시작한 것은 유원이 영향이 컸을 테고, 책을 읽고 무언가 자꾸 쓰는 것은 선생님의 가르침 때문이리라. 참 감사할 일이 아닐 수 없다. 학교는 이렇게 아이들을 키워 놓는다.


갓난아이 때부터 제 동생을 예뻐했던 손녀는 영락없는 Kㅡ장녀다. 양보하고 내준다. 동생이 어지럽힌 걸 치우고 닦는다. 제가 읽겠다고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도 동생이 먼저 읽게 한다. 동생이 체스대회에서 우승했다고 선물을 사주며 좋아한다. 정작 본인이 출판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책을 출판했을 때나, 어린이 기자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저학년부 기자상을 받았을 때도 동생이 서운해 할 수도 있다고 좋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손주들이 아웅다웅 커가는 것을 보면 세상 참 살맛 난다. 내 아들 딸이 클 때보다 더 이쁘고 사랑스럽다. 늙은이들의 생각이 다 똑같을 테지만, 나만 그럴 거라는 독단적인 생각을 하면서 헛웃음을 짓는다. 늙은이가 오래 사는 방법이 손주들과 같이 지내는 거라고 하던데 아가들이 커나가면서 점점 곁에서 멀어지는 것 같다. 사실 그래야 한다. 자기들의 지경을 넓혀야 하니까.


딸이 친구들과 늦게까지 놀아야 한다고 해서 손주들을 우리 집으로 데려왔다. 너무나 얌전하다. 적어도 중학생 정도의 수준으로 논다.

ㅡ아가들이 오늘은 중학생같이 얌전하네.

ㅡ학교 다니니까 선생님께 잘 배워서 그렇구나.

아내와 나는 세상에 있는 칭찬이란 칭찬은 다 긁어모아 쏟아냈다.

ㅡ엄마와 할머니 집에서 얌전히 지내겠다고 약속했거든요.

ㅡ저희는 약속을 꼭 지키는 사람이거든요.

ㅡ할머니, 저희 발리 여행 가요.

ㅡ오, 그래? 돈이 많이 들 텐데.

ㅡ걱정 없어요. 제가 말 한마디 하면 해결되거든요.

ㅡ말 한마디?

ㅡ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말 한마디'하면 돈을 다 갚은 게 되잖아요.

1학년 짜리 손자는 넉살스럽게 웃는다.



다음날 제 엄마가 데리러 왔다.

ㅡ할머니 집에서 잘 지냈을까. 약속을 잘 이행했을까.

ㅡ잘 지켰어. 엄마. 이따 보면 알 거야.

ㅡ뭘 이따 보면 알아?

ㅡ그렇다니까. 그렇지 누나.

ㅡ응, 맞아 이따 보면 알아.


오리누룽지 백숙으로 점심을 먹고 집으로 간다고 나서는데 아내가 아이틀 손에 만원씩 쥐어준다.

ㅡ어쩔까. 돈이 이것밖에 없어서 어쩔까.

ㅡ고맙습니다.

ㅡ안녕히 계세요.

ㅡ또 올게요.

ㅡ얌전히 있을 게요.

돌아서는 뒷꼭지가 참 예쁘다.


ㅡ엄마, 잘난 손자 두었어.

주차장에 내려가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있다며 딸이 전화했다.

ㅡ왜? 뭔 일인데? 지호가 또 뭐라고 했구나.

아내가 뻔하다는 표정과 궁금한 얼굴로 묻는다.


ㅡ엄마, 약속이 틀렸어.

ㅡ뭔 약속이 틀려?

ㅡ할아버지가 할아버지 집에서 자면 5만 원 주신다고 했는데 만원만 주셨어. 4만 원이 손해야.


우리는 한바탕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5만 원권이 없어서 못줬다고 안타까워하고 있었는데 손자한테 제대로 한 방 먹었다.


시간은 흘러갈 것이고, 그것이 모여 세월도 뒷모습을 보이면, 다 희미해질 터이고 자꾸만 안개에 싸여 갈 건데, 그때에도 좀 뚜렷이 남아있으면 좋겠다. 그때 그랬었다고,  손주들이 커나가고 있었고, 자기들이 스스로 아침밥을 해 먹었고, 사진 찍어 우리에게 자랑했었다고. 손주들 덕분에 세상 사는 재미가 있었다고. 


 그랬으면 좋겠다. 우리들의 소풍은 참 좋았다고 껄껄껄 웃으며 피안의 세상으로 걸어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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