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바로 세우자
푸른 뱀의 해, 그래서 청사靑蛇의 해라는 을사년.
폭설이 온 나라를 덮고, 한파가 세상을 얼리며 시작한다. 뭔가 희망을 품어보려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얼어붙게 만들면서.
명리학에서는 천간天干 갑甲과 을乙을 목木의 기운이라고 한다. 갑甲은 커다랗고 곧게 솟아오르는 거목으로 말하고, 을乙은 옆으로 어우러지며 뻗어나가는 덩굴 같은 식물로 말한다. 지지地支사巳와 오午는 여름의 기운이다. 그렇다면 을사乙巳의 해는 덩굴 식물이 여름을 만났으니 무성하게 뻗어가는 격이라고 볼 수 있겠다. 푸른색이 돋보이는 희망이다. 뱀이 지혜의 동물이고 보면 을사년은 무엇인가 잘 되고 왕성하게 전진하는 해가 될 듯싶다.
그런데 세상이 폭설 아래 짓눌려 있다. 새해를 맞아 부모님을 찾아뵙고, 가족들을 만나 손을 잡고 덕담을 나누며, 등을 토닥이며 마음을 공유하려는, 조금은 들뜬 마음을 저렇게 폭설과 한파가 눌러대고 있다. 길이 막히고, 바람이 불어 마음을 헤집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설을 맞아 가족들과 함께하는 춘천 여행을. 눈이 막아버린 길, 바람이 뒤흔들어버린 마음을 무엇으로 달래야 할 건가.. 무너져버린 마음을 다독이며 창밖만 바라보고 있다. 우리가 온기로 채우려고 했던 춘천호반의 펜션은 가족여행을 놓쳐버린 우리들의 아픔을 쓰다듬어 주기는 할까. 가족이 뭐 꼭 같은 공간에 머물러야 정을 나누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로막힌 길이 야속하기는 하다.
폭설이 세상을 덮어도, 한파가 하늘까지 얼어붙게 할지라도 우리가 숨을 쉬고 소통의 문을 닫지는 않는다. 길이 막히니까, 세상이 얼어붙었으니까 전화 걸어 마음을 잇고, 힘을 나눈다. 희망은 그렇게 허망하게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온전히 나의 것이 아닌가. 폭설이 내렸다고 해서, 바람이 휘몰아친다고 해서 그렇게 휘둘리는 것은 아니다. 푸른 뱀의 해 시작을 이렇게 한다고 해도 우리는 마음까지 오그라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지난해 너무나도 엄청난 일을 당했기에, 그런 짓을 해놓고도 뻔뻔한 그 입을 놀려대고 있는 무리들을 보는 것이 더욱더 견디기 힘든 모욕이기에, 오늘 마음이 남김없이 짓이겨지고 있다. 폭설은 잠깐이면 사라진다. 그야말로 눈 녹듯이 없어진다. 그러나 그 뻔뻔한 얼굴과 입은 끝까지 우리 곁을 맴돌아 다닐 것이다. 맴돌아 다니는 것만이 아니라 야금야금 우리의 삶을 무너뜨릴 것이다.
청사靑蛇의 해. 폭설로 시작은 했지만 을목乙木이 나타내는 덩굴은 가로막는 뻔뻔한 무리들의 벽을 타고 넘을 것이다. 느릿하지만 끊임없이, 힘을 합해 손을 잡고, 보란 듯이 벽을 넘을 것이다. 담쟁이 같이
담쟁이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춘천 여행이야 가지 못하면 어떠랴. 폭설이 세상을 좀 덮으면 어떠랴. 곧게 자란 소나무 허리를 숭덩숭덩 부러뜨렸으면 어떠랴. 폭설은 녹아 추악한 모습으로 세상을 질척일 것이고, 그 질척거린 물이 양분이 되어 부러진 나무뿌리에 힘을 얹어 줄 것이 아닌가. 아픔으로 성장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가 아닌가. 실컷 울고 났을 때 마음이 후련해지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그 카타르시스라는 것. 설날을 후려쳐버린 폭설과 추위 속에서 우리를 향한 발걸음을 디디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마음을 열어야 한다.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힘이 거대하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 살고 있는 담쟁이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