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9화 할아버지, 우리 어떻게 해요? 너무 무서워요.

by 힘날세상

ㅡ할아버지, 큰일 났어요. 엉엉엉......

아산 도고산을 오르고 있는데 손녀가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해놓고는 말을 못 하고 울기만 한다.

아이의 목소리로 봐서 뭔가 충격을 받을 만한 일이 일어난 것이 분명하다. 순간, 심장이 두근거리며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시간부터 확인했다. 10시 35분.

ㅡ채아야, 왜 그래? 무슨 일이야?

ㅡ아파트에 화재발생했다고 엉, 엉. 계속 방송이 나와요.

화재 발생이라고? 나도 놀라고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러나 아이가 놀랐는데 나까지 그런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ㅡ채아야. 놀라지 말고 할아버지 말을 잘 들어.

ㅡ할아버지 어떻게 해요? 무서워요.



딸이 요가 수업을 할 때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책도 보고, 그림도 그리다가 재미없으면 영화도 보며 논다. 초딩 1, 3학년 아이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자기들만의 시간을 보낸다. 엄마한테 배우는 영어나 중국어 시간도 재미있고, 엄마랑 만들어보는 요리 시간도 하하 호호 즐겁지만, 자기들끼리 보내면서 나름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것도 좋다고 한다.



ㅡ빨리 긴 패딩을 입고 현관으로 가. 전화는 스피커 폰으로 켜놓아. 지호도 같이 듣게.

ㅡ현관으로 왔어요.

ㅡ지호도 다 입었지?

ㅡ네,

아이들은 조금 안정된 것 같았다.

ㅡ먼저 현관문을 살짝 열고 어떤지 말해 봐.


제발, 현관 밖에 연기가 차 있지 않기를 바랬다. 일각이 여삼추라고 정말 초조하고 긴장되었다.


ㅡ아무렇지도 않은데요.

ㅡ지호야. 연기가 나지 않지?

ㅡ네, 연기는 안 나는데요. 그냥 평소랑 똑같아요.


휴우, 다행이다.

그렇다면 가까운 곳에서 화재가 발생한 건 아니다.

ㅡ이제 밖으로 나가는데 엘베는 절대 타면 안 된다.

비상계단으로 내려가는 거야.

ㅡ엘베 타면 안 된다는 건 알아요.

ㅡ비상계단으로 내려가는 문 앞으로 가.

ㅡ문 앞에 왔에요.

ㅡ아까처럼 문을 살짝 열어 봐. 연기가 나면 얼른 닫아야 돼.

ㅡ열어봤는데 괜찮아요.

ㅡ됐다, 무서워하지 말고 내려가.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고 내려가.


계단을 내려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걱정했던 상황은 아닌 것 같다. 계단도 이상이 없다면 화재 지점은 다른 동이거나 가까운 곳은 아닌 게 분명하다.


ㅡ채아 지호야. 걱정하지 말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1층에 도착하면 말해. 잘 내려가고 있지?

ㅡ네.

ㅡ계단에 불도 자동으로 켜지지?

ㅡ네, 그런데 지하 1층까지 내려와 버렸어요.

ㅡ그럼 아까처럼 문을 살짝 열어봐.

ㅡ제가 문을 열어버렸는데 괜찮아요.

손자가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말한다. 이 녀석들 이제 마음이 안정되었구나. 나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ㅡ할아버지, 광장으로 나왔는데 아무렇지 않아요


아이들은 평정을 되찾은 것 같다. 이제야 나도 들숨날숨이 편안해졌다.


아무렇지도 않다고? 그렇다면 오작동이 틀림없다.

그럼 확인해 봐야지.


ㅡ너희들 정문에 있는 관리실 알지?

ㅡ어린이집 있는데요?

ㅡ그래. 실제로 화재가 발생한 건 아닌 거 같아. 이제 왜 방송이 나왔는지 알아봐야지.

ㅡ여기 광장에서 금방 갈 수 있어요.

아파트 광장에서 정문 관리실은 금방 갈 수 있다. 늘 다니는 길이고, 가까우니까.


ㅡ할아버지, 오늘 소방점검하느라고 그런 방송이 나온 거래요. 아저씨가 얼른 집으로 가라고 했어요.

아이들은 이제 평소대로 말하고 행동한다.

ㅡ근데 할아버지, 너무 추워요, 저희가 실내복만 입은 채로 나왔거든요.

ㅡ누나는 신발도 그냥 들고 나왔어요.

ㅡ학교에서 배운 대로 손으로 입과 코를 막고 나왔어요.



한순간의 해프닝이었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딸이 아이들과 같이 오늘 일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상황에 맞게 대처방안을 말해줬다고 한다. 아이들도 그때그때 자기들의 느낌을 말하고 행동요령을 스스로 익혔다고 한다. 일회용 방독마스크를 구입해 놓아야겠다.



불시에 실전적인 화재 대피 훈련을 한 아이들에게 할머니가 만들어준 갈비찜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8화 을사년, 청사靑蛇의 해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