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황혼, 그 아름다움
ㅡ참 곱네.
ㅡ정말?
ㅡ정말.
ㅡ웬일일까? 곱다는 말을 다하고.
ㅡ오늘따라 유난히 고와.
ㅡ늙어서야 이런 말을 다 듣네. 오래 살아야겠어.
ㅡ어쩜 저렇게 붉을까.
ㅡ내가 아니었어?
ㅡ황혼.
ㅡ그러면 그렇지.
ㅡ황혼이 저렇게 붉은 이유를 알아?
ㅡ레일리 산란(Rayleigh scattering). 중학교 과학 선생님이 가르쳐 줬지. 그 훤칠한 잘 생긴 남자. 보고 싶다.
ㅡ잘 생긴 남자는 무슨.
ㅡ질투?
ㅡ질투.
ㅡ해가 지거나 뜰 때, 태양빛이 지구 대기를 통과해야 하는 거리가 한낮보다 훨씬 길어지거든. 그 긴 거리를 통과하다 보면 파장이 긴 빨강, 주황만 살아남는 거지. 파란 노을 봤어?
ㅡ아니.
ㅡ멋있을 거 같은데.
ㅡ파란 노을이?
ㅡ응.
ㅡ얼굴에 내려앉은 붉은빛과 그 붉은빛을 받아들인 당신. 아름다워.
ㅡ정말?
ㅡ정말.
ㅡ황혼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기도 하는구나.
ㅡ정확하게 말하면 노을이야.
ㅡ맞아. 황혼은 시간의 개념이고, 노을은 현상을 말하니까.
ㅡ그래.
ㅡ그게 뭐 대수야. 아름답다는 말이 중요하지.
ㅡ하긴.
ㅡ행복해. 이래서 월명암 낙조대를 노을 맛집이라고 하는가 봐.
ㅡ노을이 아름다운 건.
ㅡ아름다운 건?
ㅡ저 해가 걸어온 시간의 끝이기 때문이야.
ㅡ문과 출신들은 이게 문제라니까.
ㅡ이과 출신들은 이게 문제라니까.
ㅡ재미없어.
ㅡ국화가 피기 위해서는
ㅡ봄부터 소쩍새가 울어야 하지.
ㅡ이럴 땐 맘에 드네.
ㅡ그래도 내가 여잔데 그 정도도 아닐까 봐.
ㅡ먹구름 속에서 천둥이 울어야 하고.
ㅡ간밤엔 무서리가 내려야 하고.
ㅡ그래. 잠도 안와야 되지.
ㅡ그것들이 국화를 피우는 거지.
ㅡ우주적 협동 어쩌고 한 거 같은데. 국어 시간에
ㅡ노을도 협동일까.
ㅡ그렇지 않을까.
ㅡ협동...... 협동이라......
ㅡ협동이지. 아니 협력인가.
ㅡ보상이지.
ㅡ뜬금없이 웬 보상?
ㅡ하루를 살아온 거에 대한 보상.
ㅡ해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건데도?
ㅡ마지막은 아름다워야 하니까.
ㅡ마지막?
ㅡ그래, 마지막.
ㅡ말하자면 삶의 끝.
ㅡ싫어. 왜 그런 말을 해.
ㅡ노을은 해만 만들어내는 게 아냐.
ㅡ......
ㅡ......
ㅡ천상병 시인인가. 소풍 끝내는 날
ㅡ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ㅡ우린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을까.
ㅡ적어도 당신은.
ㅡ나?
ㅡ그래. 당신.
ㅡ......
ㅡ당신은 당신이 아닌 우리 가족을 위해서만 살았으니까.
ㅡ그렇다면 당신의 소풍도 아름다웠지.
ㅡ당신에겐 시댁과 시댁 식구의 짓누름이 있었잖아.
ㅡ눈물 나려고 해.
ㅡ울어도 돼.
ㅡ큰애 가졌을 때 비 오는 날 밤늦게 시장까지 걸어가서 팥죽 사 왔잖아.
ㅡ자매팥집 할머니가 말했어. 색시한테 잘하라고.
ㅡ잘해줬잖아.
ㅡ그래도 아이는 혼자 낳았잖아.
ㅡ그거야 안보내준 우두머리가 문제지.
ㅡ늘 미안했어.
ㅡ아니라니까.
ㅡ해가 곧 넘어가겠다.
ㅡ프랑스에서는 황혼 녘을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한대.
ㅡ프랑스 사람들 웃기는 사람들이네. 개? 늑대는 뭐고?
ㅡ황혼에는 어둠 때문에 저기서 다가오는 게 꼬리치고 반겨주는 개인지, 나를 해치려는 늑대인지 구분이 안된다는 거야.
ㅡ아니. 이렇게 아름다운 시간에 왜 그런 생각을.
ㅡ노을빛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밀려오는 어둠을 어쩔 수는 없으니까.
ㅡ그럼 우리도 황혼 녘에 서 있는 거네.
ㅡ언제든지 어둠에 덮여버릴.
ㅡ그렇겠네. 황혼은 꺼져가는 빛이니까.
ㅡ꺼져가는 빛.
ㅡ서서히, 자기도 모르게.
ㅡ누구도 모르게.
ㅡ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ㅡ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ㅡ잠자는 것처럼.
ㅡ잠자는 것처럼.
ㅡ아름답게.
ㅡ아름답게.
ㅡ누가 봐도 아름답게.
ㅡ누가 봐도 아름답게.
ㅡ사랑했어.
ㅡ사랑했어.
ㅡ사랑해.
ㅡ사랑해.
ㅡ사랑할 거야.
ㅡ사랑할 거야.
ㅡ왜 이렇게 흘리고 먹어. 칠칠치 못하게.
ㅡ양말 벗으면 빨래통에 좀 담아 놔. 치우는 사람 따로 있어?
ㅡ소파에만 누워 있을 거야. 좀 나가서 놀아.
ㅡ밥상 차려놓으면 빨리 좀 와서 먹어.
ㅡ내가 못 살아.
ㅡ전화 좀 짧게 해.
ㅡ잔소리 좀 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할 게.
ㅡ돈 좀 쓰고 살자.
ㅡ나는 자연인이다 좀 보자고.
ㅡ아휴, 답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