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그때가 좋았는데
ㅡ웬 꽁치?
ㅡ시장에 갔더니 엄청 팔고 있길래.
ㅡ꽁치 맛이 제대로네. 역시 묵은 김치를 넣어서 끓여야 해.
ㅡ그렇지? 어릴 때 먹던 생각나지?
ㅡ어머니가 쌀 한 되 주고 엄청 사서 매달아 놓고 겨울 내 끓여 먹었는데.
ㅡ지금은 그런 맛이 왜 안 나는지 몰라.
ㅡ맛있기만 한데. 당신이 음식 솜씨가 좋으니까.
ㅡ맛나게 먹어보자고.
ㅡ그냥 냄비 채 내오면 되지 그릇에 담을 게 뭐야. 늙은이들이 대강대강 먹으면 되지.
ㅡ그래도 제대로 그릇에 담아서 차려야지.
ㅡ꽁치가 동해에서 많이 잡히는 생선인데.
ㅡ그래서 값도 쌌었지.
ㅡ시장에 나오는 건 모두 대만산이야.
ㅡ그런데 국산 꽁치를 쌓아놓고 팔고 있더라니까.
ㅡ꽁치의 귀환인가?
ㅡ언젠가는 꽁치 김밥도 있었는데.
ㅡ맞아, 꽁치 김밥.
ㅡ그래도 꽁치 찌개가 으뜸이지.
ㅡ어릴 때 먹던 맛이 그립네.
ㅡ그때가 좋았는데.
ㅡ좋았지. 하루 종일 놀기만 했지.
ㅡ얼음 타다가 물에 빠지고.
ㅡ여자들은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방에서 놀았지.
ㅡ점심 먹고 나가면 해 떨어질 때 돌아왔지.
ㅡ당신은 뭐 하고 놀았어?
ㅡ설매 타고 다니다가 싫증 나면 연 날리고.
ㅡ우린 고무줄놀이나 실컷 했는데.
ㅡ지금 생각하면 그게 뭐가 그렇게 재밌었는지 몰라.
ㅡ당신은 그때로 돌아가라면 갈 거야.
ㅡ나는 돌아가고 싶어.
ㅡ배고픈 시절로?
ㅡ배는 고팠지만 어울려서 노는 재미가 있었잖아.
ㅡ밖에만 나가면 모든 곳이 놀이터였지.
ㅡ삼한사온.
ㅡ그때는 왜 그렇게 추었는지.
ㅡ12월부터 내린 눈이 3월까지 쌓여 있었지.
ㅡ남자들은 마당에 쌓인 눈 치우는 게 하루의 시작이었잖아.
ㅡ눈 구덩이에 고구마 넣었다가 꺼내 먹으면 시원하고 맛있었잖아.
ㅡ그때는 냉장고가 없었으니까.
ㅡ겨울에 넣어둔 고구마를 눈이 녹은 다음에 먹었을 때도 있었지.
ㅡ맞아 넣어 둔 걸 잊어버리고 말이야.
ㅡ요즘 아이들은 그런 재미를 몰라.
ㅡ그때처럼 살라고 하면 못 산다고 할걸.
ㅡ그 시절 얘기하면 고개부터 돌리잖아.
ㅡ방학할 때 나눠주는 "방학생활" 한 권 풀어보는 것이 공부의 전부였지.
ㅡ책도 없고, TV도 없고.
ㅡ그러니 돌아다니며 놀 수밖에.
ㅡ"학원" 생각나?
ㅡ그걸 모를 수가 없지. 동네에서 돌려가며 읽었는데.
ㅡ철인 23호
ㅡ철인 28호였지. 일본 작가가 그린 만화.
ㅡ맞아. 철인 28호. 번개 아톰도 있었고.
ㅡ철인 28호는 덩치가 컸고, 아톰은 아주 작았지만 강력했지.
ㅡ요즘 아이들에게는 그런 게 안 먹힐걸.
ㅡ요즘 시대를 반영하지 못하니까.
ㅡ"황금박쥐" 생각나?
ㅡ"유불란" 탐정?
ㅡ닭살이 돋을 정도로 재밌었는데.
ㅡ내용은 기억이 안 나.
ㅡ그때가 좋았지.
ㅡ그때가 좋았어.
ㅡ요즘은 순정純情이 없어.
ㅡ'순정純情' 오랜만에 들어보네.
ㅡ'순정만화'라는 영화가 있었지 않나?
ㅡ그건 내가 말하는 '순정純情'이 아냐.
ㅡ순수純粹한 마음?
ㅡ응.
ㅡ우리가 점점 잃어가고 있는.
ㅡ아니 거의 다 잃어버린.
ㅡ요즘 연애에도 그런 게 있을까?
ㅡ가슴 떨리고.
ㅡ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ㅡ심장이 콩콩거리는.
ㅡ순정純情.
ㅡ그래 순정純情.
ㅡ요즘 연애는 없을 것 같아.
ㅡ통하면 바로 손을 잡아버리는데 가슴이 콩콩거릴 틈이 어디 있겠어.
ㅡ드라마에서도 엄청 진도가 빠르잖아.
ㅡ순정純情이 없으니까.
ㅡ마음이 익어가는 시간이 다 사라졌으니까.
ㅡ어쩔 거야.
ㅡ그러니까.
ㅡ이럴 때 막걸리 한 잔 해야 하는 건데.
ㅡ와인은 있어.
ㅡ와인?
ㅡ딸이 준 거.
ㅡ마실까?
ㅡ마실까!
ㅡ갑자기 덕유산 삿갓봉이 생각나는데.
ㅡ그 눈이 다 덮었던.
ㅡ갈까?
ㅡ갈 수 있을까?
ㅡ그때가 좋았지.
ㅡ아들 꼬셔서 갈까?
ㅡ간다고 할까?
ㅡ방학이니까.
ㅡ일주일인가 출제하러 들어간다고 했는데?
ㅡ끝나면.
ㅡ끝나고도 대만과 베트남 두 곳이나 간다는데.
ㅡ저대로 놀게 둬.
ㅡ우리 아들이 아니네.
ㅡ철원 물윗길이나 걸어보자고.
ㅡ주상절리길까지 걸어야지.
ㅡ그런 의미에서 한 잔.
ㅡ그래 한 잔.
ㅡ책상 정리 좀 해.
ㅡ뭐가 어때서.
ㅡ이러고도 글이 써져? 나오던 글이 도로 들어가겠다. 지저분하다고.
ㅡ어지러움 속에서 창의성이 싹튼다는 걸 몰라.
ㅡ하여튼 남자들은. 아들이나 아빠나 똑같아.
ㅡ오늘을 왜 안 혼나나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