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별곡 6

비로든, 눈으로든

by 힘날세상

ㅡ비가 오나?

ㅡ눈도.

ㅡ뭐야. 눈비?

ㅡ비눈.

ㅡ뭐래!

ㅡ꼭 비는 눈에 밀려난다니까.

ㅡ밀려나다니.

ㅡ드라마에서는 분위기 맞출 때 꼭 눈이 내려.

ㅡ소담스럽잖아.

ㅡ소담?

ㅡ뭔가 꼭 안아주는 듯한.

ㅡ눈이?

ㅡ눈이.

ㅡ눈은 음흉해.

ㅡ음흉?

ㅡ눈 덮인 세상. 그냥 가리고만 있는.

ㅡ아름답잖아. 포근하고.

ㅡ비는?

ㅡ축축해. 불편하고.

ㅡ비와 눈이 다른 점이 뭔지 알아?

ㅡ다른 점?

ㅡ비는 꼭 인기척을 해.

ㅡ인기척?

ㅡ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ㅡ자기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게 어디 있어.

ㅡ비를 봤어?

ㅡ비를?

ㅡ정지용은 비를 이렇게 보았거든.


정지용

돌에

그늘이 차고,

따로 몰리는

소소리바람.

앞서거니 하여

꼬리 치날리어 세우고,

종종 다리 까치걸음

산새 걸음걸이로.

여울지어

수척한 흰 물살,

갈갈이

손가락 펴고.

멎은 듯

새삼 돋는 빗낯

붉은 잎 잎 소란히 밟고 간다.


ㅡ시는 시일뿐이고.

ㅡ종종 다리 까치걸음, 산새 걸음걸이. 비의 모습이야.

ㅡ그런 거라면 나도 할 수 있거든.


어젯밤 누군가 흘린

긴 침묵.

발등을 덮는 무게가 아니라

깊이 파인 기억을 지우는 농도 짙은 백색의 것.


ㅡ누구 시야?

ㅡ그냥 눈을 보는 내 시선.

ㅡ기억을 지우는 농도 짙은 백색의 것?

ㅡ농도 짙은 백색의 것.

ㅡ그렇군.

ㅡ그렇지?

ㅡ비는 아픈 기억을 당장에 씻어내지.

ㅡ그렇지만 비는.

ㅡ비는?

ㅡ무거워.

ㅡ프랑스 영화에는 비가 내려. 무거움으로 씻어서 더해주는 감정.

ㅡ영화 러브스토리에서 눈은 상처를 덮어 마음을 살려내지.

ㅡ비가 씻어내는 것들.

ㅡ눈이 덮어서 지우는 아픈 것들.

ㅡ늙어서 보면 둘 다 심난하긴 심난하지

ㅡ그렇긴 하지만 늙었어도 낭만은 지니고 있어야지.

ㅡ낭만.

ㅡ그래 낭만.

ㅡ무뎌져 가는 감정.

ㅡ살아있었으면.

ㅡ비로든.

ㅡ눈으로든.

ㅡ씻어내야 할 게 많아.

ㅡ덮어야 할 것이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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