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나 문학이나.

인간의 마음 앞에서는

by 힘날세상


ㅡ일단 서점으로 갈 거예요.


초등학교 3학년인 손자가 체스대회에 나가 받은 상금 3만 원을 들고 한 걸음에 달려간 곳은 서점이었다.


ㅡ이건 세뱃돈이나 생일 축하금하고는 비교할 수 없는 거죠. 그래서 꼭 제 마음에 영원히 담아 두려고 해요.

ㅡ영원히 담아 두겠다?

ㅡ네, 그래서 책을 사려고 해요. 다른 것은 없어질 수 있지만, 책을 읽어 얻은 것은 제 마음에 담겨 있을 거니까요.

ㅡ그렇구나.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네 마음에 담겨 있는 그 책의 내용이 네가 나이가 들어갈 때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한다는 거야?

ㅡ아, 동적 구조 말씀이죠?

ㅡ아니,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ㅡ전에 할아버지가 말씀해 주셨잖아요. 신데렐라가 항상 똑같은 신데렐라가 아니라고요.


자기 침대에 틀어 박혀 해리포터를 읽고 있기에 끼어들었다가 지나가는 말로 동적구조에 대해 말했었는데 그걸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진열되어 있는 책 사이를 오가며 이 책 저 책에 마음을 내려놓았으나, 쉽게 손에 들지는 못하고 있다. 처음에 손자가 펼친 책은 <서양철학 이야기>였다. 나는 깜짝 놀랐다. 윌 듀런트의 <철학이야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국문과와 철학과는 한마디로 공부하는 학과가 아니었다. 영문과, 사학과 친구들이 도서관으로 향할 때 국문과는 철학과와 편먹고 야구를 하거나, 잔디밭에서 막걸리를 마셔댔다. 잔디밭에 질펀하게 늘어선 막걸리는 '인간'으로 수렴했고, 국문과는 인간의 본질이 문학이라고 목소리를 높였고, 철학과는 철학이라고 핏대를 세웠다. 그때 국문과는 철학은 쓸데없는 말장난이라고 쏘아댔고, 철학과는 문학이야말로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맞받아쳤다.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씩씩거리며 등을 돌렸지만, 다음날 국문과와 철학과는 또다시 아삼육이 되어 어깨를 겯고 돌아다니며 '문리대文理大'에서 영문과와 사학과는 빼버려야 한다고 떠들어댔다.


다른 대학교도 그랬겠지만 우리 대학 국문과의 캐치프레이드Catchphrase는 "좌우지간 놀자"였다. 시험이 다가와도 국문과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어학을 공부하는 친구들 몇이었다. 어학은 어느 정도 객관적인 이론이 세워져 있었고, 그래서 공부하지 않으면 절대 답안을 작성할 수 없었다. 그러나 문학은 정해진 답이 없다. 그냥 시험지를 받아 들고 자신의 느낌을 써놓으면 되었다.


국문과에서는 2학년이 되면 '현대문학개론'을 배웠다. 정년퇴직이 얼마 남지 않은 노교수님의 강의는 '몰개성론没個性論Theory of Impersonality'이 알파요 오메가였다. 시험문제는 언제나 '몰개성론没個性論Theory of Impersonality에 대해 논하라'였다. 몰개성론Theory of Impersonality은 시인이 자신의 사적인 감정이나 개성을 작품에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경계하고, 예술을 정서의 탈피로 보는 관점으로 20세기 모더니즘 문학의 기틀을 마련한 영미 시인 T.S. 엘리엇T.S. Eliot에 의해 확립되었다. 교수님이 가르치는 내용은 이것이 전부였다. 나머지는 우리 몫이었다. 수많은 시를 읽어야 했고, 소설이나 수필까지 영역을 넓혀가며 몰개성론을 탐닉해야 했다.


국문과의 진수眞髓는 바로 '몰개성론'에 대한 어떠한 답안을 제출하는가였다. 답안의 족보라는 것이 선배들 사이에서 흘러 다녔고, 그것을 얻기 위해 3, 4학년 선배들의 뒤를 따라다녀야 했는데, 막걸릿집에서 얻어낸 결과물은 몰개성론이 작가가 자신의 개성에서 탈피해야 하는 것처럼 '족보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노교수님은 늘 새로 들어온 문학 풋내기들이 써내는 때 묻지 않아서 신선한 답안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학생들은 죽을 맛이었고, 교수님은 새로운 음식을 눈앞에 둔 즐거움을 만끽하셨다.


그런 점에서는 철학과도 만만하지 않았다. 철학과에도 그런 교수님이 계셨다. 역시 2학년 때 개설된 '철학개론'을 가르치는 교수님은 어쩌면 그렇게 우리 '현대문학개론' 교수님과 똑같았을까. 두 분이서 만나면 우리들의 답안지를 안주삼아 술잔을 퍽이나 기울이지 않았을까. 철학개론의 시험 문제는 언제나 '인간의 본질에 대하여 논하라'였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족보를 찾아다녔고, 결국에는 찾아낸 족보는 내팽개쳐야 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KBS 드라마 연출가였던 철학과 친구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논하라'는 답안지에 '무無'라고 썼다가 교수님께 불려 갔다. 잔뜩 기대했던 교수님 앞에서 친구는 답안을 작성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했는데 신선감을 느낀 교수님은 질문공세를 펼쳤다. 친구는 대답을 안 하는 것으로 교수님의 질문을 받아냈다. 그리고 연구실을 나오면서 '영원히 답을 말할 수 없기에 인간은 존재하고, 교수님의 철학개론 수업과 시험문제도 이어지지 않을까요?'라고 기어가는 소리로 말했는데 A+ 학점을 받았고, 그 교수님의 추천에 힘입어 서울 지역의 대학으로 편입했다. 재밌는 것은 시끄러운 세상으로 가서 다양하고 다기多岐한 인간들을 접해보라는 것이 교수님이 그의 등을 떠민 이유였다는 것이다.


윌 듀런트의 <철학이야기>는 '몰개성론'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지만, 당시 대학생이 되면 읽어야 하는 책으로 알려졌었다. 읽어야 하긴 하지만, 쉽게 읽어지지 않는 책. 나는 엉뚱하게도 '몰개성론'을 갖다 붙이며 남들이 읽어대는 책이라면 읽지 않는 것이 몰개성이라고 핑계를 대며 설렁설렁 필요한 만큼만 읽었다. 철학과 학생들은 그래도 제대로 읽는 편이었다.


친구가 읽던 <철학 이야기>를 넘겨보다가 문득 의문이 떠올랐다. 도대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케케묵은 듯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어야 할까 하는. 이 책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베이컨, 스피노자, 볼테르, 칸트, 쇼펜하우어, 스펜서, 니체, 베르그송, 크로체, 러셀, 산타야나, 제임스, 듀이 등 모두 15명의 철학가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왜 그 유명한 소크라테스는 빼놓았을까. 어쩌면 철학가 중 한 명을 꼽아보라고 하면 가장 많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말할 것 같은 소크라테스를. 소크라테스가 스스로 실천하여 깨달아야 한다며, 거리에서 사람들과 대화하며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 상대방의 무지를 깨닫게 하는 소위 '산파술(Maieutics)'의 철학자였기 때문일까. 그래서 그의 제자이지만 변하지 않는 완벽한 진리의 세계인 '이데아(Idea)'를 상정하고, 이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방대한 저술 활동을 펼쳤던 학문 중심의 철학자 플라톤에서 더 매력을 느꼈을까. 말도 안 되는 생각으로 책을 자꾸 덮었다. 물론 그건 풋내기 대학생의 철없는 행동이었다.


그런데 초딩 3학년 손자가 철학책을 집어 든 것이다. '서양 철학 이야기'라는 책을. 이 책은 초등학교 선생님이 어린이들을 위해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 형태로 풀어놓은 책이다.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은 소설Novel처럼 방대한 서사 구조와 작가주의적인 철학을 담은 만화를 일컫는 용어로, 일반적으로 가볍고 오락성이 짙은 '코믹스'와는 달리, 문학적인 성격이 강해 '어른을 위한 만화'로 불리기도 한다.


2학년 때는 학교 도서관에서 물리학 책을 빌려다 읽기도 했는데 오늘은 철학 책이다. 내용을 이해하지는 못한다고 해도 그런 종류의 책을 읽으려고 하는 것이 기특했다. 철학이 무엇인가. 인간이 지혜를 얻기 위해 사유하고 탐구하는 학문이 바로 철학이 아닌가. 어차피 세상은 인간이 이끌어가고 있는 것이기에 철학은 언제나 우리의 앞에 놓이기 마련이기는 하다.


작가가 자기의 개성을 던져버리지 않고도 독자들을 깨달음의 세계로 이끌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몰개성이라는 내용으로 답안을 작성하였던 나는 철학과 친구에게 심한 놀림을 받았었다. 문학에서 깨달음을 말하지 말라던 친구와 격하게 입씨름을 했었다. 몇 곳의 막걸릿집을 돌면서 문학과 철학은 모두 인간을 말하고 있으므로 결국은 하나라는 매듭을 짓고 우리는 헤어졌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지난 후에 친구는 당시 놀랄만한 시청률을 보였던 드라마 두 편을 세상에 내보였다. 후일담으로 그는 드라마에서 그동안 보아왔던 다양하고 다기多岐한 인간들의 모습을 그려 보이려고 했다고 말했다. 철학이든 문학이든 드라마든 모두가 사람 사는 이야기일 뿐이라고.


한참이나 들고 있던 '서양 철학 이야기'를 내려놓은 손자는 시집을 들었다. 나태주 시인의 '아무래도 봄이 다시 오려나 보다'를.

ㅡ왜 이 책을 골랐어?

ㅡ제목이 좋아요.

ㅡ제목?

ㅡ제목은 책의 내용을 말하는 거라고 하셨잖아요.

덜렁덜렁 듣는 듯해도 늙은 할아버지의 말을 마음에 담아두는 모양이다.

ㅡ그렇긴 한데, 어째서 제목이 마음에 들었을까.

읽는 순간 마음에 감동이 밀려왔다고 했다. 그래서 그 느낌 그대로 살려 훗날 연애편지를 쓰고 싶다고 했다.


잠시라도

나태주


만나자

잠시라도 만나자.


서둘러

줄 것이 있어서 그래


아니야

잠시라도 보고 싶어서 그래.


손자가 읽고 있는 페이지다. 우주선을 만드는 게 평생의 꿈인 아이에게 나태주 시인의 나긋나긋한 이야기가 스며들고 있다. 사람의 감정은 어른이나 아이나 다를 게 없는 모양이다. 철학을 들고 있었던 아이였는데, 어느 순간 시에 매료되어 있다.


느껴지는 게 있었다. 철학이라고, 문학이라고 경계를 짓는 그 의미 없는 일을 사람은 한다. 뺨과 턱을 구분하려 하고, 12월 31일과 1월 1일을 굳이 나누려고 한다. 분절적 사고다. 철학이든 문학이든 받아들이는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일 텐데 말이다.


ㅡ서양 철학 이야기를 읽을 때와 아무래도 봄이 다시 오려나 보다를 읽을 때 느낌이 어땠어?

ㅡ어른들은 책을 읽고 난 느낌을 왜 물어보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받아들이는 건데요.

ㅡ서로 나누면 좋잖아.

ㅡ그냥 혼자 가지고 있을 필요도 있잖아요. 제가 접어 놓은 종이비행기에 실려 있는 제 마음처럼요.


그런 것이었구나. 지금 생각해 보니 몰개성이니 인간의 본질이니 하는 것도 받아들이려는 과정에서 내가 쏟는 힘과 받아들인 후 내 안에서 궁굴리며 익혀가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일 것 같았다. 바로 교수님들이 문학, 철학의 곁으로 다가서려는 학생들에게 매번 똑같은 시험문제를 제시하신 것도 바로 그런 이유이지 않았을까.


손자가 작년 가울에 썼던 시를 다시 읽어본다. 그 아이가 받아들였던 마음을.


마음


아빠가 부대로 돌아갔다.

나랑 잘 놀아준 아빠

비가 내린다.

덩달아 내 마음 한 구석에서도

비가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