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무더위가 세상을 짓밟는다. 염제炎帝는 세상 곳곳에 영역표시를 해두고 불길 같은 혓바닥을 날름거린다. 자기 세상이라고 아침부터 광폭한 얼굴로 쿵쾅거리며 휩쓸고 다닌다. 사람들은 염제가 휘두르는 칼날에 베이고, 그 무지막지한 발길질에 차여 여기저기에서 맥없이 쓰러진다. 맞설 수도 없는데, 물러설 곳도 없다.
정중동靜中動!
더위를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선풍기를 돌려놓고 서재의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책을 읽는다. 몸이 좀 끈적거린다고 해도, 책이 펼쳐내는 세상으로 틈입하면 충분히 견뎌낼 수 있는 힘을 얻기도 한다.
머리를 써야 할 정도의 책을 읽는 것은 되치기를 당할 수 있다. 이런 때 가장 좋은 책은 가슴으로 읽을 수 있는 여행기가 제격이다.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와 김훈의 ‘자전거 여행’, 곽재구의 ‘포구기행’,을 서가에서 빼 왔다. 몇 번을 읽은 책이지만, 볼 때마다 새로운 감정이 돋아나는 까닭이다. 뜨거운 매실차도 한 컵을 따라와 작은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국어사전과 우리말 분류 대사전도 가져다 놓는다. 작가들이 생명을 불어넣은 낱말의 깊이를 들여다보기 위해서다.
이제 서재를 두껍게 채우고 있는 고요를 즐기면 된다. 16층 높이까지 올라오는 소음은 배달 오토바이가 바쁘다며 토해내는 꽹꽹거리는 소리뿐이다. 한낮의 적막을 무너뜨리는 그 섬쩍지근한 소리가 들려오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전화기의 전원도 끈다.
‘여행의 이유’를 캐다보니 삶과 글쓰기, 타자에 대한 생각들로 이어졌다. 여행이 내 인생이었고, 인생이 곧 여행이었다. 우리는 모두 여행자이며, 타인의 신뢰와 환대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 여행에서뿐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도 많은 이들의 도움 덕분에 굴러간다. 낯선 곳에 도착한 이들을 반기고, 그들이 와 있는 동안 편안하고 즐겁게 지내다 가도록 안내하는 것, 그것이 이 지구에 잠깐 머물다 떠나는 여행자들이 서로에게 해왔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일이다.
김영하는 여행을 우리의 인생이라고 말하면서 책장을 덮는다. 여행이 인생이기에 우리는 낯선 곳에 늦게 도착하고도 제 걸음으로 걸을 수 있고, 숨을 쉬고, 잠을 잘 수 있었나 보다. 더불어 사는 이웃들의 배려와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면, 우리는 우리 뒤에 도착하는 여행자들에게 똑같이 해야 한다는 것. 작가가 찔러오는 일침一針이다.
인생은 정말 여행일까.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언제나 낯섦의 가운데에 있어야 한다. 어린 시절에 서울행 완행열차는 밤을 달려 이른 새벽에 서울역에 도착했다. 낯선 곳을 내딛는 발걸음에서 두려움을 걷어내 주려는 배려였을지도 모르겠다. 하루가 짱짱하게 보장되는 시각이라면 버스를 잘못 타더라도 무서워하지 않고 대처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서울에 어느. 정도 적응하고 아들・딸 집의 대문에 편안한 얼굴로 들어서는 것처럼, 인생도 험한 세상에 맞서고, 견디고, 그렇게 싸워서 마지막 시간에 아름다운 황혼을 마주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인생이 여행이라면 여행의 이유는 좀 더 분명해진다.
김훈은 자신의 분신인 자전거 ‘풍륜’을 굴려 세상으로 들어간다. 눈에 덮인 도마령을 넘고, 태양이 폭정을 펼치고 있는 좁디좁은 농로를 그는 '풍륜'으로 달린다. 그렇게 김훈은 세상의 길을 몸으로 받아들인다.
길은 힘겹게 그의 몸이 되었고, 그때마다 ‘풍륜’은 넘어지고 생채기를 입었다. 김훈은 피를 흘리며 울었고, 그 울음 너머로 파헤치고 싶었던 세상을 보았다. 자신의 몸으로 들어온 길 위에서 그의 펜은 힘을 실었고, 그의 혜안慧眼은 열렸다. 자전거 여행은 배고픈 김훈에게 달짝지근하면서도 영양가가 높은 한 그릇의 밥이었다.
김훈은 만경강 포구에 서 있었다. 황혼이 붉게 가라앉는 만경강이 바다를 만나 기름진 갯벌을 모다기모다기 쏟아 내놓는 것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갯벌에 내려앉는 도요새를 바라보고 있다. 뉴질랜드 북쪽 해안에서 날아올라 알래스카를 거쳐 만경강 하구에 내려앉고 있는 도요새를.
도요새는 뻘 속에 파묻힌, 보이지 않는 먹이를 덮어놓고 쪼아댄다. 어쩌다가 걸려드는 것이다. 그러니 죽지 않으려면, 보이지 않는 먹이를 향해 쉴 새 없이 부리를 내리꽂아야 한다. 그래서 그것들의 부리는 딱딱하기보다는 부드럽고 민감하다. 부리를 무작위로 선택한 뻘흙 속에 찔러 넣고 그 안에 넘길만한 것이 들어 있는지 판단해야 한다. 넘어가는 것보다 뱉어내야 할 것이 언제나 훨씬 많다.
김훈은 도요새를 바라보았지만 사실 김훈이 바라본 것은 도요새가 아니라 사람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새들은 살기 위해서 힘겨운 비행을 하는 것이다. 그 힘겨운 닐갯짓으로 새들은 언제나 살아서 돌아온다. 어떤가. 이것이 바로 인생이 아니겠는가. 김훈이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풍륜’이 넘어지면서 열어준 ‘혜안慧眼’ 덕분임이 틀림없다. ‘풍륜’이 지나간 길에서 만난 것들 중에서 김훈의 펜끝에서 생명을 얻은 것은 얼마나 될까. 도요새가 갯벌에 부리를 박고 쪼아댄 것 중 그 얼마 안 되는 ‘넘길만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도요새의 날갯짓보다 더 많은 발을 굴려서 김훈은 ‘자전거 여행’을 쓰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가 '풍륜'을 타고 건져올린 고갱이는 얼마나 값진 것일까 우리는 셈을 해봐야 한다.
남해의 어느 작은 포구의 가로등 기둥에 등을 대고 곽재구는 한참이나 앉아 있다. 길고 긴 포구 여행을 마치려 했을까. 가슴으로 봇물 터지듯 솟구치는 시상詩想을 감당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발로 걸어 포구에 들어서고, 포구를 돌아 나갈 때마다 시인은 가슴을 부여잡았을 것이다. 시상은 그의 걸음을 거치며 단단히 익어가다가 가로등에 기대앉은 그의 등을 뚫고 솟아올랐을 것이다.
문득 깜깜한 바다 한가운데서 희미하게 떠오르는 불빛 하나가 보입니다. 그 불빛은 내가 앉은 가로등 밑둥까지 천천히 다가옵니다. 작은 배 위에 한 노인이 등불을 들고 서 있습니다. 그가 내게 삿대를 내밉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의 배 위에 오릅니다. 세월이 가고 다시 세월이 오고, 그 속에서 밥을 먹고 시를 쓰고 파도소리를 듣고, 그러다가 그 길목 어디에서 우연히 시의 신을 만나 함께 배 위에 오를 수 있음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 일일까요.
포구마다 바람이 불었고, 그 바람에 그는 시를 얹었다. 세상을 시로 채우고 싶었으리라. 시속에 삶을 담고 싶었을 것이다. 때로는 처음 시에 젖어들던 스무 살 청년으로 돌아갔고, 때로는 알 수 없는 생의 온기를 느끼며 세상 속으로, 그 만만찮은 벽 위로 힘차게 부딪쳐 나갈 용기를 얻기도 했다.
곽재구는 여행의 끝에서 등불을 들고 서 있는 시의 신神을 만났다. 그동안 앞이 보이지 않았던 그는 얼마나 많은 울음을 울었을까. 곽재구가 쏟아 놓은 눈물은 한곳으로 모여 시퍼런 바닷물 위에 떠 있는 작은 배가 되었을까. 그는 아픈 가슴으로, 매운 바닷바람을 헤치며 힘든 걸음을 걸었다. 그리고 그는 그 힘든 걸음으로 시를 썼다. 생명이 살아 있는 시를.
작가들은 어쩌면 신神이다. 넓고 깊은 눈을 가지고 있으며, 사물이나 현상을 낱낱이 빠개고 파헤쳐, 보이지 않게 숨겨져 있는 세상을 한 올 한 올 드러내 우리의 마음에 올려놓는 신神. 그것도 모두의 심금을 울리는 힘을 실어 우리 앞에 가져다주는 신神.
『여덟 단어』를 쓴 박웅현은 책의 서문에서 “돈오점수頓悟漸修‘라는 말을 쓰고 있다. ’갑작스럽게 깨달아서 그 깨달은 바를 점차적으로 수행한다‘는 불교 용어이다. ’자존, 본질, 고전, 견, 현재, 권위, 소통, 인생‘이라는 여덟 개의 단어를 통해 자신이 던지는 화두를 놓고 가랑비에 젖어드는 것 같은 시간을 가져보라고 한다. 진리를 깨닫는 하나의 방법인 셈이다.
작가라고 해서 갑자기 깨닫지는 못할 것 같다. 그들은 점차적으로 수행하면서 깨닫지 않을까. 분명히 여행은 고통이 따른다. 다만 작가는 여행길에서 고통 뒤쪽으로 굼적굼적 따라오는 깨달음의 그림자를 발견하는 것이다. 깨달음의 존재조차도 모르는 우리 같은 범부凡夫들은 작가들의 시구詩句라도 끌어안고, 돈오頓悟하고, 점수漸修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