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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힘날세상 Aug 09. 2023


브런치 스토리 작가가 되다.

             

산기슭이든 고샅이든 어디든 손바닥만 한 땅일지라도 꽃은 피었다. 그렇게 봄은 세상을 열었고, 사람들이 모여든 곳마다 수국이 파란색, 빨간색, 흰색의 노래를 부르면서 여름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끝끝내 35도가 넘게 공기를 덥히다가 세상을 다 가리려는 듯 장맛비를 쏟아냈다. 사람들은 꽃노래를 부르다가 그대로 쓰러져 더위에 짓눌렸다. 늘어뜨린 혓바닥으로 물 폭탄을 맞았다. 힘을 잃었다. 나는 장맛비와 함께 죽었다. 가슴을 쥐어짜다가, 울음을 울다가 물  폭탄을 맞은 사람들 옆에서 죽어버렸다.  

   

들꽃이 머리를 들고 있을 때, 4월도 농익어 진달래가 이별의 정한을 노래하고 있을 때였다. 나 스스로 글빚의 아가리로 걸어 들어간 것은, 꽃이 피는 창을 열고 싶었다. 가슴에 창을 내야 할 만큼 속이 끓었다. 무엇인가 무너뜨려야 살 것 같았다. ‘벼락과 해일만이 길일지라도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라고 노래하던 서정주 시인의 속내를 훔쳐서라도 창을 열어야 했다.      


봄부터 책으로 둘러싸인 서재에 앉아 여름을 지나고 있다. 낡은 선풍기 하나 옆에 앉혀놓고 앉은뱅이책상에 노트북을 올려놓았다. 서가에 등을 기대고 자판을 두드리며 온몸을 칼로 그어대는 아픔을 속으로 갈무리하고 있다. 정지용 시인의 『유리창』에 매달리던 ‘외로운 황홀한 심사’ 딱 그것이다.    

  

열리지 앉는 창을 열어보겠다는 무모한 돌진은 멸망한 지구의 황폐한 벌판을 걷는 외로움이었다. 아무것도 손에 가진 것이 없이 실체도 드러나지 않는 괴물과 맞서 싸워야 하는 극한의 외로움. 어설프고 나약한 존재가 감당해야 하는 외로움 말이다.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희미한 빛을 보았다. 이내 사라져 버리는 가늘고 가는 그 희미한 빛. 비틀거리는 걸음일망정 멈추지 않게 하는 이유가 되었던, 마치 약 올리는 듯한 그 희미한 빛.      


외로움과 그 뒤로 보이는 희미한 빛에 기대어 자판을 두드려 알량한 글을 쓰는 일은 ‘황홀’하기까지는 않았지만, 은근한 즐거움이 묻어나기도 했다. 물론 글빚에 몰리는 고통이 거의 전부였지만.     


브런치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브런치 작가를 시켜주세요.’하고 나설 수는 없지 않은가. 무엇인가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다. 여름까지 매일 1편씩, 100편의 글을 쓰고, 브런치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스스로 글을 쓸 수 있는 힘을 기르고 난 후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햇볕을 등지고 굴속에 들어가 마늘과 쑥을 먹어 사람이 되겠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며 비웃음을 스스로 지었다.      


그래도 시작했으니 달려야 했다. 멈추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결코, 아름다울 수 없는, 드러내고 싶을 만큼의 무게와 가치도 없는, 지나가는 바람 줄기 같은 것일지라도 다 쏟아내려 했다. 한 번의 눈길로도 다 들여다볼 수 있는 지극히 가벼운 치졸함의 덩어리일진대 내놓아서 무엇에 쓸 것인가. 그래도 내놓고 싶었다. 무딘 붓끝일망정, 괴발개발 쓰고 싶었다.      


글을 쓰는 것은 사람들 앞에서 홀랑 벗는 일이다. 자신의 치부를 실오라기 하나 가리지 않고 다 드러내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살아 있는 글을 쓸 수 있다고, 젊은 ‘문장론’ 교수님은 핏대를 세웠다.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고 난 후에야 그때부터 ‘글’을 쓸 수 있다고 했다. 자신을 가리고 있는 옷을 다 벗어버리고 매의 눈으로 세상을 관찰하여 궁굴리고 궁굴려 펜을 들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100편의 글을 썼을 때, 옷을 벗는 것이 아니라 더 두꺼운 옷을 껴입고 있는 나를 보았다. 얼마를 더 걸어야 할까. 얼마를 더 노를 저어야 보물섬에 닿을 수 있을까.      


‘그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다’라는 책을 읽었다. 서점에서 한꺼번에 다 읽고 난 후에 책을 샀다. 14,420원을 카드로 결제했다. 늙어가는 내 곁을 호위무사처럼 지켜주는. 서점을 나오면서 힘이 났다. 


책에서 말하고 있는 대로 생각해 보자. 나에게는 세상을 이쪽저쪽 찔러볼 수 있는 눈이 있다. 자판을 빠르게 두드릴 손가락이 있다. 좀 둔해졌어도 들여다본 것들을 합치고 나눠 의미와 가치를 끌어낼 수 있는 머리도 있다. 복잡해지고 무서워지고 있기는 하지만 세상을 향한 시선 하나는 세울 수 있을 것 같다. 비록 늙은 각도이기는 하더라도.     


마지막까지 불을 밝히고 있는 108동 807호의 불이 꺼지기를 기다려 날이 밝을 무렵에 브런치 스토리 작가 신청을 했다. 비밀 임무라도 수행하는 것처럼 아무도 보지 않는 시각에, 말하자면 ‘글빚’의 아가리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마음 내킬 때 블로그에 허접스럽게 끼적거리는 글로는 벗어날 수 없는 굴레를 뒤집어썼다.     


그리고 며칠 후, 작가로 뽑혔다는 통보를 받았다. 기뻤다. 도리짓고땡에서 장땡을 잡았을 때의 전율이 온몸을 휘어 감았다. 그러나 그것이 견딜 수 없는 무거움이라는 속삭임도 귓가에 내려앉았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마그마를 감당할 수 없다. 세상을 향해 던지고 싶은 돌팔매들을 어쩔 수가 없다. 그렇더라도 작가는 느닷없이 쏟아지는 소나기가 아니다. 진득하게 내리는 빗줄기이다. 수증기를 흠뻑 빨아들인 두꺼운 구름의 두께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그래서 울고 또 울어야 하는.     


브런치 스토리 앞에 작가로 서게 된 지금 두려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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