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이발소 가는 길

by 힘날세상

숲길을 따라 오후를 걷는다. 미세먼지가 가득하다고 해도 어디 봄날이 그렇게 쉽게 무너지겠는가. 하늘이 좀 흐려졌지만, 나뭇가지 연둣빛 함성이 가득하고, 철쭉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대고 있는 것을. 보랏빛 제비붓꽃은 발밑에도 봄의 세상이 펼쳐져 있다고 아우성이다.


봄날은 오후가 좋다. 조금 비스듬하게 내려오는 햇살이 마음까지 스며들기 때문이다. 닫힌 마음을 열어 놓기만 하면, 봄날은 한 번의 까탈도 부리지 않고 깊이 가라앉아 묵고 묵어버린 시간까지 다독거려 놓는다.

좋다. 햇살이 좋다. 피어나는 담록淡綠이 좋고, 붉은 꽃이 좋다. 오후가 좋다. 그렇게 말갛게 씻은 마음으로 궐리사 뒷길을 걸어 이발하러 가는 봄날이 좋다.


먼지가 날리는 신작로를 걸어 기차역 앞에 있는 이발소로 동생과 같이 머리를 깎으러 갔었다. 으레 그렇듯이 어머니는 돈을 주지 않았다. 이발료는 없고, 부끄러움만 가득한 걸음은 더디기만 했다. 우리는 길섶에 피어난 클로버 하얀 꽃송이만 부지기수로 꺾어 꽃시계를 만들며 걸었다. 손목에 매달은 꽃시계가 몇 개인지 셀 수도 없다. 동생은 아무 말 없이 손목을 내밀어 내가 걸어주는 꽃시계를 받았다. 동생의 양 손목은 꽃시계 세상이었다. 우리는 겸연쩍은 웃음을 웃었다. 그러나 우리의 발걸음은 빨라지지 않았다.

봄날 오후 햇살을 받으며 머리를 깎으러 가는 길에는 솔숲을 흔드는 바람이 가득하다. 나무를 흔들고, 꽃잎을 흔든다. 가녀린 풀잎까지도 바람은 사정없이 흔들어댄다. 그러나 햇살 앞에서는 바람은 꿈쩍도 못 한다. 바람은 세상을 다 흔들어대지만, 햇살은 흔들지 못한다. 머리를 깎으러 가는 걸음이 가볍다. 이럴 땐 콧노래라도 흥얼거려야 제맛이다.


오늘도 이발소 여사님은 그 한 옥타브 높은 웃음을 터뜨리며 느릿하게 가위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순서를 기다리는 늙수그레한 남정네들 몇이 앉아 실없는 농담을 건네기도 하다가 자식들 흉이나 보고 있을 것이 뻔하다. 그러다가 차례가 되면 다소곳이 앉아 여사님이 깎아 주는 대로 머리를 맡길 것이다. 케이블 TV에서는 그 오래된 ‘전원일기’가 방영되고 있을 터이다. 낡은 이발소의 자늑자늑한 풍경이 마음에 들었고, 드나드는 사람들이 털어놓는 케케묵은 이야기는 어린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켜서 좋았다.


어렸을 때 우리 집은 참 가난했다. 어머니의 지갑은 늘 비어있었고, 아침마다 돈을 달라고 떼를 쓰던 우리들의 마음은 늘 서러웠다. 학용품을 사야 한다며 졸라대는 우리에게 어머니는 달걀 하나를 주었다. 달걀이 귀했던 때인지라, 달걀 하나면 공책 몇 권 값은 되었었다. 우리는 그때마다 부끄러운 얼굴로 달걀을 내밀고, 공책이며, 크레용을 받았다. 일곱이나 되는 자식들을 먹이고, 입혀서 가르쳐야 하는 것은 늘상 어머니의 몫이었다. 빈 지갑으로도 어머니는 일곱 자식을 길러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가 움켜쥐고 있었던 지갑에는 눈물만 가득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몸을 던져 속울음을 울었고, 우리는 어머니의 눈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시덕거리며 고샅을 돌아다녔다.


없는 살림에 꼬박꼬박 이발료를 손에 쥐여 주며 이발소에 보낼 수는 없었던 어머니는 가위를 들어 우리의 머리를 직접 깎아 주었다. 아무리 가위질을 잘한다고 해도 여기저기 쥐 뜯어먹은 같은 것을 본 우리가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는 소동을 벌인 후부터는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았다. 문제는 어머니가 이발료를 주지 않는 것이었다.


동생과 나는 어두운 얼굴로 이발소 앞에 서 있었다. 출입문을 벌컥 열 수 있는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동생은 울먹이고 있었다. 부끄러웠다. 돈이 없는 것도 부끄러웠고, 동생이 그것 때문에 울먹이는 것도 부끄러웠다. 우리는 차라리 어머니가 깎아 주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가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는 것은 더 견딜 수 없는 일이라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돈은 어머니가 나중에 드린다고 했어요.’라는 말을 차마 입에 올릴 자신이 없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놈들, 머리 깎으러 왔으면 얼른 들어올 것이지 왜 거기에 서 있어. 얼른 들어오느라.” 어쩌다가 밖을 내다보던 이발소 아저씨가 우리를 불렀다. 아저씨는 동생부터 의자에 앉히고 머리를 깎아 주었다.

“니들 이발료는 니들 어머니가 벌써 주고 갔단 말여. 앞으로도 몇 번 더 깎을 만큼 주었응게 담부터는 걱정하지 말고 들어와서 깎아도 되는 거여. 알았냐?”


이발소 아저씨는 아버지 친구분이었는데 돈을 받지도 않았으면서 받은 척을 하며 우리의 부끄러움을 싹 지워주신 것이었다. 이발료는 아저씨가 받지 않는다고 극구 말렸으나 어머니가 이발소 아저씨네 논일을 할 때 하루씩 품을 팔아주는 것으로 갈음하였던 것은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아저씨에게서 들었다.


우리는 머리를 깎으러 갈 때에 느리게 걸었던 신작로를 땀에 흠뻑 젖어가며 어머니에게로 달려갔다. 당당하게 이발소 문을 열 수 있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이제 부끄럽지가 않았다.

“어머니가 머리 깎는 돈을 다 주었다고 이발소 아저씨가 말했어. 다음에도 그냥 깎아 준대.”

“그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걱정하지 말고 가서 깎어.”

서정주 시인은 자신을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었다고 노래했지만,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굳세고 옹골찬 생활력이었다. 여자의 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농사일을 해가며 일곱 자식을 다 건사해 낸 어머니의 대찬 마음이었다.


어머니를 따라 살지 못했다. 어머니가 몸으로 가르쳐 주셨던 그 야무진 삶을 잇지 못했다. 절약하며 살았다고 했지만, 나의 곳간은 비어있기 일쑤였고, 밀려오는 삶의 파도 앞에 독하게 맞서보았지만, 나는 늘 무너지고 넘어졌다. 그것을 삶의 끝부분을 걷고 있는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잘 가꾸어 놓은 묘지 앞에 철쭉이 화사하게 피었다. 하얀 꽃을 피운 철쭉은 한 그루인데도 붉은 꽃 사이에서 도드라지게 다가왔다.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눈물이었다. 흰 철쭉은 바람에 흔들리지 않았다. 햇살만큼이나 꼿꼿하게 허리를 곧추세우고 바람 앞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