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무너진 뒤에야 보이는 타인과 이웃의 고통
아픔은 잔인하지만, 그 통로를 지나온 사람만이 더 깊고 따뜻한 세계를 본다 - 최장금 -
임신을 하면 임신한 사람만 보이고 아파보면 아픈 사람만 보인다. 내가 불편과 고통을 경험하면 예전에는 스쳐 지나가던 낯선 타인이 쉽게 외면되지 않는다. 몸이나 마음의 통증을 지나온 사람만이 알게 되는 감각이다. 의사도 마찬가지다. 아파본 의사와 아파보지 않은 의사가 환자를 대하는 태도는 같을 수 없다. 몸이 부서지는 고통, 밤새 뒤척이는 불안, 치료의 좌절을 경험해 본 의사는 환자를 증상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 본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겪었던 아픔을 책으로 남긴다. 아파보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었던 진실들을. 반면 아파보지 않은 의사는 늘 그래왔듯 교과서대로 진단하고 치료한다. 낫지 않더라도 “이 방법이 최선입니다”라는 말만 반복할 뿐, 고통을 겪은 사람이 아는 진실한 온도에는 이르지 못한다.
사람은 아픔을 통과할 때 비로소 세계가 넓어진다. 내 몸이 아프고, 내 아이가 무너지는 순간을 지나야 이웃의 고통이 눈에 들어오고, 그동안 들리지 않던 신음이 귀에 닿는다. 아픔은 잔인한 경험이지만, 그 고통을 지나온 사람만이 더 깊고 따뜻한 세계에 발을 디딘다. 세상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방향이 달라진 것이다. 닫혀 있던 감각이 열리고, 잊고 지냈던 온기가 되살아난다.
나에게 가깝고 소중한 것일수록 통증은 더 직접적이었고, 나에게 먼 것일수록 통증은 간접적이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나의 세계는 통증을 기준으로 재편된다고 하겠다. 나의 몸으로부터 시작하여 나의 자녀와 가족, 친구와 동료의 고통은 원초적으로 느껴지고 타 민족과 인류를 넘어 세계 전체로 나아가는 고통은 너무나 멀고 희미하게 느껴지지 않던가.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채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