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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석 같은 명작들을 잊어가고 있다

삶의 지혜 -20

by 명형인

이번에는 가치를 이루는 것에 대한 주제입니다.

아픔과 고통, 슬픔은 현대사회에서 회피되고 있는 감정입니다. 요즘은 살아가는 삶의 하나같이 너무 버거워서 내가 상처받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고, 귀찮은 일을 굳이 만들고 싶지 않은 세상이에요.


저도 사람들을 만나면서 사람들이 서로 굳이 귀찮고 힘든 일, 마찰을 만들고 싶지 않아 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세상에 꼭 존재하는 나쁜 놈들을 만나지 않기 위해서 그런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역사를 보면 수십 세기를 걸쳐 꼭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빌런은 하나 둘 있습니다. 역사를 뒤흔들어 바꾸진 않아도 자잘하게 수천 년을 걸쳐 악행을 해온 빌런들의 기록은 어느 나라에도 존재합니다. 그래서 저는 단순히 빌런들이 요즘 부쩍 많아져서 고통과 슬픔조차도 사치다라는 주장에 공감이 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본인 하나 건사히기에도 버거워서 주춤하는 동안 빌런들이 이때다 하고 틈타 날뛰는 바람에 빌런들이 더 폭증하지 않았나 상상을 합니다. 마치 끊임없이 복제하는 바이러스처럼요.


유행하는 글들을 보면 하나같이 고통을 줄이는 방법, 인간관계 무난히 해내는 법, 나르시시스트 탐지기.. 일명 인생 속의 안 좋은 에너지를 박멸시키는 데 열정적인 글들이 많이 올라오는데요.

생각해 보면 요즘 시대에는 명작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명작의 정의가 달라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과거의 작품들은 마음을 울리고
깊은 여운을 남기는 명작들이 많았습니다.

요즘 작품들은 토닥토닥 마음을 위로해 주고
공감이 찰떡같이 와닿아야 명작입니다.


저는 위와 같은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또 요즘 시대의 명작과 과거부터 꾸준히 이어졌던 명작이 어떻게 다른지 새로운 의견을 내시리라 믿습니다.


과거에는 고통과 슬픔, 갈등을 승화해 낼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아마 너무 척박한 환경 속에서 표출을 하지 못하니 고심하다가 작품으로 승화시키지 않았을까요?

옛날 명작을 보면 은유와 비유법등을 사용하는 추상적인 표현들이 많습니다. 일례적으로 사회적인 규율이 심했고 차별이 지금보다 훨씬 난무했던 시대에는 대상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추상적인 대상으로 빗대어 말하는 글이 많습니다. 주인공도 저자 본인을 포장해서 자서전을 빙자한 소설들이 많이 올라온 이유로 납득됩니다. 아시아 명작들이 이러한 특징을 많이 보이고, 유럽 미국 쪽 명작은 세계 1차 2차 대전 시대 명작들이 이러한 특성을 갖고 있는 걸로 기억합니다. 그 이후에는 현대문학이 들어서면서 현대문학 명작들이 쏟아졌죠.


은유와 추상적인 표현의 장점은 그 글 한마디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고 모든 독자들에게 제 각각 다른 의미로 감동을 줄 수 있는 특별한 힘이 있습니다. 글 한마디가 전 세계를 울린다는 말이 있음 얼마나 좋을까요!


현실적으로 공감하며 위로해 주는 것과 다른 차원의 울림과 공감을 주는 언어의 기술이지요. 요즘은 돌려서 표현하는 화법을 단단히 잘못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악랄하기 그지없는 나쁜 영역에서 돌려서 표현을 하죠. 좋은 의미와 세상을 바꿀 의도로 돌려서 표현하면 얼마나 다행일까요! 돌려서 까는 건 훨씬 더 아픕니다.


제 기억 속의 세계 2차 대전 이후 책들은 현대판타지 소설이랑 매우 흡사하게 현실감을 섞은 판타지 풍 명작들이 나왔습니다. C.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도 있지요. 제가 좋아하는 명작들 중 미하엘 엔데 작가가 쓴 책들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최근에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미하엘 엔데의 저서 중 모모가 인기가 많아 베스트셀러로 교보문고에 지정되었더라고요. 끝없는 이야기가 아닌 모모가 압도적인 승리입니다. 왜 그럴까 곰곰이 고민해 봤는데, '모모'가 현대인들에게 조금 더 와닿았던 것 같습니다. 미하엘 엔데가 감성에 완전히 지우 치지 않는 예리한 감각을 가진 작가로 손꼽을 정도고 문체가 상당히 독특해서 웬만한 사람들이 아니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단순히 추상적인 어투로 노래하는 작가는 아닙니다. 끝없는 이야기는 생각이 깊은 사람들도 해석이 제각각 엇갈릴 정도로 매우 난해한 어린이 판타지 소설입니다. 이 난해함이 끝없는 매력이지만 진입장벽이 높아요. '모모'는 같은 작가가 쓴 책인데도 제가 읽을 때 진입 장벽이 낮습니다.


미하엘 엔데를 언급한 이유는 - 제가 서점에 가서 오프라인 책 구매하려고 끝없는 이야기를 검색했는데 재고가 없다고 나오더군요. 설마 하고 미하엘 엔데를 검색해 보니 모모는 재고가 있고 끝없는 이야기는 재고가 없어서 아쉬워하던 찰나가 생각났습니다. 그때 오기가 생겨서 분석을 했습니다. 결과는 저의 완패였지만 모모도 명작이라 괜찮습니다.


명작도 요즘은 판매순입니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원하는 책이 절판되기 전에 빨리 주워 담아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끝없는 이야기가 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명작은 깊이 들여다봐야 그 가치를 볼 수 있습니다. 요즘은 그 깊이가 얕아짐을 느껴 많이 안타까워요.



비단 책뿐만 아니라 웹툰, 만화, 그림 등 예술 창작계 들은 현재보다 과거에 다양한 분야의 명작들이 많이 탄생했습니다. 그때 당시의 고난과 고통이 명작을 존재하게 만들었습니다. 웹툰도 네이버 웹툰을 초 중학생 때부터 봐오신 분들은 잘 아실 거예요. 학생 때 시절부터 대학생 시절 때 네이버 웹툰이 제일 전성기였습니다. 한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장르에서 주옥같은 작품이 많이 탄생해 골고루 읽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하필, 왜 혼돈의 시기에 유독 명작이 많을까요?

세상도 어지럽고 나라도 정치도 불안한 시대에
혼돈과 함께 보석이 태어났습니다.


지금은 특정 분야를 깊이 덕질하시는 분들이나 웹툰도 좋아하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요즘 창작물은 돈이 되는 한 곳에 몰아넣고 있습니다. 여전히 두드러지는 창작물이 하나 둘 존재하지만 예전 같지는 않아요. 잔잔하게 균일한 재미가 있습니다. 미술도 음악도 무용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소설도 요즘은 제 손에 잡히는 소설은 거의 최소 60년 전 최대 20년 전 소설이네요. 참 재미있습니다. 요즘 나오는 소설들도 재미있지만 오락거리 같은 느낌입니다. 제가 취향이 독특한 것일 수 있습니다.


제 뇌에서 나오는 도파민이 고갈돼 가고 있는 걸까요?




100년 이상 오래가는 것들은 힘이 있습니다.

이유가 없는 명작은 없습니다.
이유가 있기에 최소 50년 거뜬히 넘어갑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풍족함 속에서 살면서 고통을 너무 외면하고 있지 않은지요.

우리가 사회에서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잘 살리면 좋겠습니다.


생각의 깊이도, 인간관계도 얕아져 가는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명작을 그리워하는 날이 올 것 같습니다.


마냥 막연하게 그리워할 날을 만들지 않길.



고통과 슬픔 속에서 세상을 울릴 명작이 탄생합니다.

슬픔과 고통 없이는 명작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너무 많은 것을 잊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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