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이 바뀌는 순간은 항상 조용했다

9화

by 명형인

체벌방에 꼼짝없이 갇혀 두 시간 내내 눈물을 흘리고 총을 들고 나온 아저씨를 피해 정신없이 달렸던 것도 돌아보니 추억이다. 내가 한 행동에 따른 결과였기 때문에 큰 불만은 없었다. 오히려 내 어린 시절은 재밌고 즐거웠던 기억 투성이다. 힘들고 무서울만한 일들이 전부 다 좋은 추억으로 남은 셈이다.


어릴 때부터 나는 호기심이 많아 뭐든지 직접 경험해 보고 싶었던 아이였다. 부모님은 내가 가는 길에 튀어나온 돌이나 가시덤불들을 미리 치워주고 싶어 했다. 나는 그 위를 밟고 지나가는 쪽을 선택했다. 경험 덕분에 얻은 교훈도 많았다. 그렇다고 내가 한 행동이 항상 옳은 건 아니었다. 고생길을 스스로 자초했다고 부모님이 말했을 정도니까. 고생을 사서 한다는 말은 불행을 행운으로 바꿀 수 있는 합법적인 말이다. 말은 듣는 이가 이해하기 나름이지만, 그땐 의미보다 나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부모님의 속상함이 앞서갔다. 지금은 “고생을 사서 했기 때문에” 내가 혼자서 척척 잘 해내는 거라는 칭찬을 들었다. 그땐 “고생을 사서 한다”가 부정문이었는데 지금은 긍정적으로 바뀐 것이다.


내 어린 시절은 나에겐 행운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가치관이 나랑 비슷했기 때문에 그의 어린 시절도 분명 같을 거라 믿었는데 오빠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예상 밖이었다. 사랑에 취해 행복한 꿈을 꾸는 동안 “서로의 문화적 배경이 다르면 사회 구성원의 다수가 공유하는 상식이나 감각도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기정 된 사실”을 어딘가에 던져버리고 왔나. 사랑이 이성을 마비시켜서 현실을 흐리는 일을 소설뿐만 아니라 역사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는데 그게 내 삶 가까이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뇌 속에 들어있는 중요한 것들을 전부 다 꺼내 밖으로 던져버렸는데 이제야 콩깍지가 벗겨지는 시점이 오니 난리가 났다. 나랑 오빠는 콩깍지가 벗겨져 현실감각을 되찾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오빠로부터 직접 들은 어린 시절은 그가 슈퍼히어로가 되는 과정 같았다. 도움을 요청하는 장면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오빠의 말에 의하면 오빠는 어릴 때부터 청각장애로 인해 가족들과 소통에 어려움을 겪었다 한다. 오빠가 살아왔던 시대의 한국은 장애인에 대해 관대하지 않았고 오늘날과 달리 장애인들이 공장에서 일하기도 힘들어 부모의 연금이나 재산으로 죽을 때까지 살아가거나 운이 좋으면 허드렛일을 하며 살아가는 시절이었다. 오빠 이야기를 들어보니 가족의 인맥이나 힘이 없는 장애인들은 사람답게 살기 힘든 상황으로 느껴졌다. 오빠의 부모님은 귀가 안 들리는 아들을 어떻게 교육을 시켜야 하고 안 들려서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소통을 해야 할지 고민이 많으셨던 모양이었다. 그는 제스처랑 물건을 손에 쥐어 느끼는 등 오감을 통해 부모와 형제자매들이랑 소통을 하고 세상을 배워나갔다고 나에게 말해줬다. 부모님이 오빠에게 좋은 교육을 시키고 싶어서 좋은 마음으로 장애인 학생이 없는 초등학교에 보냈는데 반 친구들이 귀머거리에다 멍청하다며 온갖 욕을 하고 따돌리기 시작해서 오빠가 고생했는데 나도 미국에서 따돌림을 당해서 왠지 공감이 갔다. 학교 폭력 문제로 오빠 부모님이 마음을 바꿔 청각장애인들만 다니는 농학교에 보냈는데 진짜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오빠의 부모님은 내 부모님이 그랬듯이 오빠에게 공부를 해야 한다며 학구열을 보이셨었다. 오빠도 나처럼 부모님이 시험 성적을 관리하셨고 시험에서 낮은 점수를 받으면 혼났단다. 그리고 게임이나 친구랑 노는 것도 학년이 올라갈수록 부모님 눈치를 봐야 했고 학원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었다. 놀면 부모님이 싫어하셨다는 말을 듣고 나는 내 부모님을 떠올렸다. 적어도 내가 자라던 환경에서 매우 흔했던 한국 부모님의 모습이었다. 여기서 오빠는 나랑 달리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고 순응하는 전략으로 살아온 것 같다. 나는 부모님의 기대와 달리 어떻게든 놀려고 잔머리를 굴려댔는데 그는 어떤 면에서 나보다 훨씬 더 어른스러운 면모를 일찍이 갖고 있었다.


나는 상당히 고집스러운 아이였고 사고뭉치여서 부모님은 나를 아들 대하듯 빠따로 다스릴 수밖에 없었다. 한 대 맞아도 꿋꿋이 놀아서 한 대 더 맞아 총 열 대를 맞아도 내가 하고자 하는 걸 해내는 고집스러운 기질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손바닥을 한 대 때려도 바로 울음을 터뜨리는 평범한 여자아이들과 달랐다. 효자손이 부러질 때까지 엉덩이 빠따를 맞아도 아빠한테 보여주기 싫어 눈물을 억지로 참는 모습을 보고 아빠가 날 때리는 것도 기가 찰 지경이었다는 건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내 어린 시절을 오빠한테 말했더니 나보고 대단하다며 엄마한테 맞는 게 안 아팠냐고 했는데 사실 엄마한테 맞는 게 너무 아팠다. 내가 90년대에 태어났는데 그때 당시에는 체벌 방법으로 때리는 것이 합법이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부모님과 학교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매로 다스렸다. 당시에는 많은 어른들이 그렇게 아이를 훈육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오빠도 학교에서 매 맞으면서 혼났고 내 부모님 역시 매를 들어 나를 훈육했다. 고집스러운 나랑 달리 그는 순응하며 부모님을 기쁘게 하려고 공부를 열심히 했다.


고등학교 삼 학년으로 올라간 남자친구는 여전히 공부에 욕심이 있었고 대학교에 가고 싶었는데 마음처럼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빠 부모님도 아들이 대학교에 가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고 학교 선생님을 만나 방법이 없는지 직접 상담을 신청했다고 한다. 오빠 부모님은 아들이 현실적으로 대학교 가기 어려우니 일찍 취업시켰다고 나에게 말했는데 오빠는 진로상담 과정에서 학교 선생님이 장애인들은 대학교를 나와도 회사에서 꺼려하고 잘 받아주지 않으니 의미가 없는 공부를 시키는 것보다 빨리 취업시켜서 일을 배우고 돈을 버는 게 사람답게 살게 해주는 길이라고 선생님이 먼저 부모님에게 말했다고 주장한다. 어느 쪽 말이 맞는진 모르겠다. 아마 둘 다 맞는 말일수 있다. 내가 추측하건대 어느 쪽이라 해도 부모님과 오빠 모두 선생님의 말을 듣고 많이 속상했을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미국 대학교를 나와야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는 말에 이야기 듣는 내내 소름이 돋았다. 내 부모님도 그때 당시 유학생 취업 붐을 인식해서 나를 미국에 보냈기 때문이다.


미국으로 유학 가는 게 아니면 대학교 졸업장을 따도 효과가 미미하다고 하니 내 고집대로 유학 가서 엄마 아빠를 금전적으로 고생시킬 바에 “내가 빨리 취직해서 월급을 많이 주는 공장에서 일하는 게 더 나았다”는 게 그의 결론이다. 부모님은 돈을 전부 다 끌어써서라도 아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고 싶었지만 오빠가 스스로 취업을 하겠다며 집을 나갔다는데 이건 오빠 어머님으로부터 이미 들은 말이다. 취업하려면 기숙사에서 숙식하며 공장 일을 배워야 했기 때문에 오빠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들었다. 실제로 오빠는 일찍 취직해서 공장에서 인력감축으로 명예퇴직 할 때쯤 월급이 500만 원 넘었고 경기도 외곽 지역에 있는 아파트를 1억에 이미 산 사람이다.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현실적으로 사람답게 욕을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에 나는 그의 현실적인 선택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오빠는 자신을 시기하고 실적을 비교하거나 훼방을 놓는 사람을 많이 만났기 때문에 감정을 숨기고 튀지 않게 사람들과 무탈히 지내는 법을 배웠다고 나한테 알려줬다. 이게 오빠가 살아가는 공동체 속에서 길고 가늘게 생존하는 비법이란다. 나는 꿈을 꾸고 쟁취하는 삶을 살아왔는데 그는 현실적으로 움직이면서 눈에 띄지 않는 길을 걸어온 것이다.


여기에서 오빠가 느리다고 생각하는 내 성격은 공격해 오는 사람들과 카드게임을 하면서 만들어졌다. 한 수를 잘못 두면, 그 자리에 다시 앉을 수 없었다. 내 성격에 대한 득이 있다면 실도 분명했다. 한국사람들은 내가 솔직하고 시원한데 거리감이 느껴져서 정감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내가 대학교에서 만난 친구는 친해지는데 1년 이상 걸렸기 때문에 이 주장은 사실이다. 하지만 오빠는 이걸 불편해했다.


자기는 그럼 어떻게 1년 만에 사귀게 됐냐고 하는데 본인이 다닌 농학교에서 고등학교 1학년이었을 때 내가 중학생이었던 사실을 생각지 못하는 것 같다. 나는 내가 사귀고 있는 사람을 중학생 때부터 알고 있었고 같은 학교를 다녔다는 명목 때문에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행사 등에서 꾸준히 마주쳤었다. 내 기준에서는 서로 10년 이상 알고 있었던 사이다. 그는 연애 초반에 나를 차갑고 이중적이라고 여겼는데 그렇게 행동을 한 이유가 뭐냐는 말엔 아직도 오빠가 원하는 답을 주지 못했다. “고생을 사서 한다”는 말처럼 “문화”도 긍정과 부정 사이에 끼어있는 글자 중 하나라서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내 남자친구가 가진 문화도 내가 해석하는 방향에 따라 나쁘게 보이기도 하고 좋게 보이기 때문이다.


고백하자면 오빠는 불을 질러도 목표물을 향해 뛰어드는 벌 같았다. 그는 뭐든지 열심인 사람이어서 인간관계를 나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관리했다. 굳이 사람들과 잘 지내야 하는지, 상대방이 무례한 게 내 눈에 뻔히 보이면서도 일단 웃으며 떡 하나 서로 주고받고 덕담을 나누는걸 그는 네트워킹이라 불렀다. 나는 그걸 무대 의상을 입고 거래처를 만나는 모습으로 보았다. 내 입장에서는 충분히 바보 같은 모습이었고, 오빠는 굳이 의심할 여지를 만드냐며 오히려 내가 바보 같다 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똑같은 입장이었다.


각자 갖고 있는 특징들은 살아온 환경에 따라 득이 되기도 하고 실이 되기도 한다. 나는 지금은 오빠가 가진 한국 문화가 좋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오빠가 완벽하게 보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정이 많고 사람들과 두루 잘 지내는 점은 분명한 장점이다. 오빠는 내가 가진 미국문화를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다. 문화의 상관관계는 이분법적으로 가르지 못하는 연인 관계랑 닮아있다. 우리가 이걸 깨닫는데 6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우리는 서로를 안아주기로 했고 그때부터 싸움이나 갈등이 줄어들었다. 마침내 결혼하기로 결심한 순간 우리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나랑 내 부모님의 문화가 서로 다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결혼하기에 앞서 걱정했던 것들이 현실이 되기 시작했다. 그 무렵부터 나는 같은 말을 해도 누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걸 알게 되었다.


판이 바뀌는 순간은 항상 조용했다.

그리고 그 조용함은, 오래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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