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고등학생이 되면서, 자기 행동에 큰 책임을 지는 미국에서 살아남으려면 전략이 필요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내가 최우선으로 피해야 할 것은 ‘체벌방’이었다. 고등학교에도 당연히 체벌방은 존재했고, 내 목표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학교 생활을 즐기는 것이었다.
엄마는 내가 공부에 얼마나 할애하느냐에 많은 신경을 썼다. 내가 체벌방 때문에 늦게 들어오거나 학원을 못 가는 날이 생기는 걸 제일 싫어했다. 방에 갇히는 것도 무서웠지만 제일 무서운 건 우리 엄마였다. 엄마에게 혼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봤는데 결론은 하나였다.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보통은 스스로 해내려고 이를 악무는 법인데, 나는 반대로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을 생각을 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건 항상 힘든 일이었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부모님은 내 성적에 더 신경 쓰기 시작했고, 방과 후에는 항상 공부에 매달려야 했다. 중학생 때는 아무리 피곤해도 스스로 벌떡 일어났는데, 지금은 이불 밖으로 나오기 힘들어 매일 아침 엄마와 전쟁을 벌였다. 바로 학교에 가겠다는 나와, 꼭 밥을 먹어야 한다는 엄마의 전쟁은 창과 방패 같았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도 지각 때문에 벌을 받았다. 그땐 문제집을 푸는 것도 안된다는 선생님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어느 날 아침, 밥을 때려잡듯 해치우고 버스 정류장으로 미친 듯이 달렸는데, 스쿨버스가 시동을 걸고 유유히 떠나는 게 보였다. 그 순간 내 머릿속의 스위치가 켜진 것 같다.
난 곧바로 “맷 오빠”를 떠올렸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내가 거의 다 알 정도였는데, 우리 학교에 다니면서 차를 운전하는 이웃이 맷이었다. 매일 아침 내가 정류장으로 갈 때마다 맷 오빠가 차를 꺼내는 모습을 봤기 때문에 차로 등교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이면 아직 집에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서, 나는 곧바로 맷 오빠가 사는 아파트 동으로 달려가 현관문을 쿵쿵 두드렸다. 이윽고 문이 열리더니, 부스스한 갈색 더벅머리의 남자가 나왔다. 틀림없이 이 사람이었다.
나는 먼저 이렇게 찾아와 미안하다며 사과하고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스쿨버스를 놓쳐서 이대로 지각했다간 엄마한테 죽는다는 설명과 함께 도움을 청했다.
가방에서 노트와 펜을 꺼내 노트 한 장을 찢어 영어로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었다.
“미안해요, 맷. 저는 스트랫포드 고등학교 1학년 클라라예요. 지금 지각 위기인데, 엄마가 알면 저 죽어요. 오늘 저녁 수프로 저를 삶아버릴 거예요. 도와줄 수 있을까요? 도와주면 보답할게요.”
일단 어깨에 힘을 빡 주고 맷 오빠 앞으로 쪽지를 쓱 건넸는데 괜히 긴장되었다.
사실 맷 오빠와는 초면이었다. 동네에서 얼굴을 마주치면 ‘헬로’라고 인사하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게 전부였고, 학교에서도 인사만 나누던 사이였다. 이렇게 집 문을 두드려 말을 건 건 처음이어서 잔뜩 긴장했는데 다행히도 면박당하진 않았다.
맷 오빠는 나를 내려다보더니 어이없으면서도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금방 나올 테니 잠깐만 기다리라고 속삭였다. 문 앞에서 잠시 기다리니 책가방을 멘 오빠가 나와서 차 태워다 주겠다며 따라오라 했다. 그날 나는 지각을 면했다.
그 후 아주 가끔씩 지각 위기가 올 때마다 맷 오빠에게 도움을 청해 차를 타고 등교했다. 가끔 엄마가 빈대떡을 해주면 한국 피자라고 소개하며 조금씩 나눠 줬고, 그때마다 맷 오빠 얼굴이 밝아졌다. 그게 내 보답이었다.
맷과 친해지면서, 그에게 여동생이 있고 내 동생과 같은 학교 친구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나만 유학 온 게 아니라 동생도 함께 미국에서 공부했기 때문이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신기한 인연이었다. 그래도 동생에겐 말하지 않았다. 엄마 귀에 들어가면 내가 떼쓰고 잔머리를 굴린다며 혼낼 게 뻔했기 때문이다.
맷 오빠는 또 지각할 위기가 오면 연락하라며 자기 번호를 알려줬다. 대신 너무 남용하지 말고 학생 본분을 다하라며 웃었다. 너 공부 잘할 것 같다고, 너처럼 대담한 애는 처음 본다고 칭찬해 줬다. 지금 생각해 보면, 미국인에게 잘 먹히는 스타일이었던 것 같다.
엄마는 내가 이런 편법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남학생 차를 탔다는 사실에 기절할 뻔했고, 고등학생이 차를 운전한다는 사실에 놀라 내가 불량한 남학생에게 잡힌 게 아니냐고 걱정했다.
텍사스에선 16살부터 제한 면허로 등하교 운전이 가능했는데, 엄마는 몰랐고 나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때 엄마한테 불법이 아니라고 설명했는데 씨알도 먹히지 않아 빠르게 내려놓았다.
어느날 엄마는 한인 어머니 모임에서 ‘텍사스에서는 만 16세부터 운전 가능하다’는 정보를 듣고 내가 꼭 알아야 한다며 전해주었다. 그리고 직접 맷 오빠 집을 방문했다. 맷과 부모님께 폐를 끼쳐 죄송하다며 사과했지만 돌아온 말은 의외였다.
맷 오빠 성이 킴벨이라, 나는 그의 아빠를 킴벨 아저씨라고 불렀다. 내가 가끔 맷 차를 얻어 타고 등교한다는 사실은 킴벨 가족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 가끔 주말 오후에 킴벨 아저씨가 나를 초대해 피자를 잔뜩 먹이곤 했기 때문이다.
아저씨 말로는, 미국에선 당당한 모습이 좋은데 이민 온 사람들에게서는 잘 보이지 않아 신기했다고 했다. 너무 혼내지 말라며 눅눅한 캐러멜 태피 한 움큼을 내 손에 쥐여주었다. 굿 걸이라며 따님이 잘 적응할 것 같다고 칭찬해 줘서 엄마도 얼떨결에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래도 맷을 너무 귀찮게 하지 말라는 충고는 어김없었다.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나는 적극적으로 사람들과 교류하며 내 부족한 부분을 빠르게 채워 나갔다. 이 과정에서 좋은 선생님들도 만났는데, 두 사람이 내 인생에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
한 분은 패티 선생님인데 청각장애가 있는 날 위해 학교에서 붙여주신 지원 선생님이자, 내 쪽지 친구였다. 내가 패티 선생님과 빠르게 친해진 방법은 맷 오빠에게 쓴 방법과 비슷했다. 친구들에게 사과를 “Apple”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아무도 못 알아들었다는 등 이야기를 쪽지로 적어 보내면, 선생님이 매번 답장을 적어 돌려주는 식이였다.
선생님이랑 꾸준히 쪽지를 주고받으며 나는 선생님에게 영어를 배우고 싶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모르는 단어가 있으면 적극적으로 알려고 했고 복습에 그치지 않고 계속 새로운 단어를 예습해서 선생님이랑 대화할 때 써먹었다. 그 모습을 본 패티 선생님은, 나에게 직접 영어를 가르쳐주고 싶다며 주말마다 서너 시간씩 자기 집에서 영어를 가르치겠다고 엄마에게 제안했다. 나에게 영어를 제대로 가르치겠다는 큰 포부를 비쳤으니 어떻게 거절할 수 있었을까.
엄마는 흔쾌히 수락했고 나는 매주 토요일마다 패티 선생님 집에 가서 ‘미국 가정집 살이’를 했다. 점심을 먹는 것부터 시작해, 미국에서 필요한 예절을 익히고 영어 발음도 배웠다. 뭘 하면 되는지, 뭘 하면 안 되는지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었다. 의사소통이 수월해지니 내 학교생활도 눈에 띄게 개선되었다.
어느 날은 친구가 나에게 “Dumb”이라고 했는데 실제로 “멍청이”라는 뜻이 맞았다. 그날 그 친구에게 “You dumb!”이라고 나에게 한 말 그대로 똑같이 돌려줬다. 그 친구는 내가 이 단어의 뜻을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다며 놀란 반응을 보였고, 이후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당시 나는 틱 증상이 조금 있었는데, 어떤 친구가 그걸 잡아 심한 말을 퍼부었다. 더럽다는 뜻인 Filthy라는 단어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옆에 있던 친구가 그냥 더럽다는 뜻이 아니라 욕에 가까운 거라고 나에게 알려주는 바람에 문제가 커졌다. 체벌방을 피하고 싶었던 나는, 결국 체벌방을 무기로 쓰게 되었다.
왜 그런 말을 하냐며, 계속 그러면 선생님께 일러바치겠다고 그 친구에게 항의했더니 반 아이들 앞에서 창피했는지 나를 팍 밀어버렸다. 뒤로 넘어가면서 칠판 모서리에 머리를 찍었는데 피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지 않았다. 뒤로 넘어지면서 그 친구 팔을 힘껏 움켜쥐어 팔뚝에 선명한 손톱자국을 냈고 선생님이 달려오셔서 우리를 바로 떼어놓았다. 이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경찰이 곁에 있었다. 결국 함께 교무실로 불러갔고 둘 다 체벌방에 사이좋게 갇혔다. 선생님은 우리를 ‘생각하는 의자’에 앉혀 서로 얼굴을 보며 잘못한 것에 대해 반성하면서 상대방에 대한 미안함을 곱씹으라 했다. 서로 꼴 보기 싫은 얼굴을 억지로 봐야 했으니 고문이 따로 없었다. 그 애도 잔뜩 심통 나있는 게 얼굴에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다음날 친구가 아빠 손을 잡고 교실에 들어왔는데 어제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친구는 얼굴이 눈물범벅이었고 친구 아빠는 굳은 얼굴로 친구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친구가 학교에 오지 않길래 결석한 줄 알았는데 늦게 아빠랑 함께 와서 반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나한테 공개 사과를 하는 상황이었다. 죽어도 사과하기 싫다는 듯 버티고 드러눕기까지 했지만 친구 아빠가 손을 당겨서 일으켜 세우니 나뭇가지에 매달린 처량한 나뭇잎 한 장 같았다. 어젠 전혀 미안하지 않단 얼굴이었던 애가 오늘은 엉엉 울며 나에게 사과하는 모습을 잊기 어려웠다. 친구에게 “아들아, 울지 말고 똑바로 사과하거라. 네가 울어야 할 상황이 아니다! 울어야 하는 건 네가 아니라 네 앞에 있는 친구다.”라며 친구 아빠가 뒤에서 호통을 쳤기 때문이다. 사과하지 않으면 학교에 다닐 수 없다는 아빠의 말을 들은 후에야 친구는 찔끔 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나에게 사과를 했고 다시는 괴롭히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내가 아는 엄마 아빠는 자기 자식을 감싸기에 바빴는데 미국에서 본 엄마 아빠들은 정반대였기 때문에 나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왜 이토록 자식에게 냉정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선생님, 부모님은 항상 잘못할 때마다 나를 감싸주는 쪽이었는데 그 친구 부모님은 왜 친구를 혼낸 거예요? 각자 헤어질 때 보니 우는 친구를 안아주지도 않았어요.”라고 쪽지에 적어 선생님께 보냈는데 “부모는 자식을 이끌어주는 역할을 하는 거란다. 아끼는 아들이 나중에 감옥에 갇히길 원하지 않아서 교훈을 주려 한 모양이구나.”라는 답장이 왔다. 그때 선생님이 나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어쩌면 미국은 어설프면 살아남기 어려운 나라일지도 모른다. 영어가 늘어나면서 내 학교생활은 훨씬 나아졌다. 놀리는 애들이 줄었고, 맞받아칠 말도 생겼다. 아는 게 힘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고 하나 보다 둘이 낫다는 걸 배웠다.
나의 또 다른 은인은 스티플 선생님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4학년까지 내 미술 선생님이었다. 이 선생님은 나보다 더한 사람이었다. 가끔씩 반 학생들을 집으로 초대해 저녁 만찬을 여는 독특한 취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학기 말에는 늘 특별 수업 날이 있는데, 스티플 선생님은 항상 ‘우리 집에 와서 스튜디오에서 그림 그리고 저녁 같이 먹기’를 내놓았다. 미술 반 학생이 약 30명이었는데, 스티플 선생님 집은 30명이 들어가도 휑할 정도로 크고 넓었다. 내 기억 속 스튜디오는 쾌적했고, 학생들이 각자 이젤을 두고 그림을 그리기에 충분했다.
선생님은 먼저 나에게 다가왔고, 나는 미술 철학과 닮고 싶은 화가들을 줄줄이 풀어놓으며 선생님과 가까워졌다. 선생님은 엄마가 바쁠 때 종종 나를 맡아주며 부모님 역할을 대신해 주기도 했다. 이때 내 인생의 고민 대부분을 선생님이 진지하게 들어주고 조언을 아낌없이 주었다.
그리고 내가 회사든 대학교든, 예술 활동이든 상관없이 미국에서 잘 될 성격이라고 믿어주었다. 내가 대학교 진학할 땐 팍팍 밀어줬다. 스펙도 돈도 인맥도 없었던 내가 메릴랜드 예술대학교에 들어가게 된 건 선생님 덕이었다. 모두가 안 될 거라 생각할 때, 스티플 선생님만이 내가 될 거라고 응원을 아낌없이 건넸다. 신뢰를 주는 모습에서 나는 공동체의 소중함을 느꼈다.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부모님뿐 아니라 내가 살던 동네 사람들이 전부 나를 키운 것 같다. 남편을 한국에 두고 어린 나와 동생을 데리고 미국으로 온 엄마의 심정을 헤아렸는지, 동네 사람들은 돌아가며 나를 돌봐줬다. 스티플 선생님도 금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이틀 동안 나를 흔쾌히 맡았다.
패티 선생님도 주말마다 나를 돌봤고, 엄마는 미안해하면서도 엄청 고마워했다. 내가 한국 부모를 두었음에도 미국인에 가깝게 자란 이유는 온 마을이 나를 키웠기 때문이다. 미국 가정집에서 내 인생의 절반 이상을 먹고 자란 시간은 나에게 신중함과 대담함, 그리고 사람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었다.
이렇게 자란 나는 훗날 나와 정반대로 움직이는 꿀벌을 만나게 될 줄 몰랐다. 연애하면서 깊이 알게 된 남자친구는 하는 일마다 진행 속도가 빠르고 고민 없이 결정을 내리는 모습이 마치 꿀벌 같았다. 나무늘보 같은 나에게 꿀벌 같은 사람은 처음엔 버겁기만 했다. 우리만의 속도를 찾기 위해 나도 그가 자라온 삶을 들여다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내가 겪은 것들과 비교하자면 장르부터 서로 완전히 다른 드라마였다. 각자의 인생을 드라마로 비추어볼 때 주인공이 역경을 헤쳐나간 방식에 따라 장르를 매겨본다면, 나는 동반 성장 서사를 가진 성장드라마이고 그는 자기 투쟁 서사를 가진 성장물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