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사람은 자라온 배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말이 있다. 나랑 내 남자친구도 그랬다. 오빠는 한국에서 평생을 살아왔고 나는 열네 살에서 스무여섯 살이 될 때까지 미국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의 경험부터 다르기 때문에 같은 문제를 두고 서로 다른 해답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각자 살아온 삶을 대하는 자세도 달랐다. 이 때문에 각자 어렸을 때 겪은 일들을 들여다봐야만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먼저 내 어린 시절부터 들여다보기로 했다. 열네 살의 나는 평균 중산층보다 소득이 낮은 서민들이 모여 사는 아파트 단지에 살았다. 미국은 경제적으로 빠듯하면 아파트에 살고, 여유가 있을 경우 2층 이상의 전원주택에서 살 수 있는 나라다. 아주 나쁜 동네는 아니었지만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 별의별 일을 많이 겪었다. 지금 한국에서 슬슬 보이기 시작하는 차별, 폭력, 마약 같은 문제들이 내가 열두 살에 미국에 갔을 땐 이미 일상 속에 녹아들었다.
언젠가 아빠가 남자친구에게 말한 적 있었다. 미국에 가보면 내 딸이 왜 강하게 자랄 수밖에 없었는지 알게 될 거라고. 아빠도 나에게 거친 부분이 있다는 걸 인정하신 셈이다. 내 입담은 센 편이지만 평소엔 잘 드러내지 않는다. 나무늘보도 겉보기에는 멍해 보이지만 발톱이 날카롭고, 나무에 오래 매달려 있어야 해서 힘도 세다. 공격할 때는 또 빠르다. 그래서 동남아에서는 나무늘보를 보면 도발하지 말고 거리를 두라고 한다. 오빠는 느려 보이다가도 가끔씩 거침없이 움직이는 내 모습에 놀라워했다. 오빠가 놀란 건 내 속도가 아니라, 내가 왜 그런 사람이 되었는지 그 이유를 몰라서였다.
나도 내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니 그런 것 같았다. 미국에서 자라며 신중함과 대담함, 사람의 소중함을 배웠고, 그게 나무늘보 같은 내 특징으로 굳은 모양이다.
내 신중함은 미국에서 시작한 첫 중학교 생활에서 비롯되었다. 한국을 떠나 텍사스에 있는 메모리얼 중학교에 들어갔는데 적응이 쉽지 않았다. 언어도 문제였지만, 진짜 복병은 따로 있었다.
어린 나에겐 미국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중학교에서 학생들은 항상 자유롭게 움직였다. 선생님은 그림자처럼 붙어있지 않았는데도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은 전부 다 꿰고 있었다. 나는 선생님의 뒤통수에 눈이 달려 있다 믿었다. 그리고 나는 꽤나 사고뭉치였다. 덕분에 ‘신중히 움직이지 않으면 제지당한다’는 교훈을 일찍이 깨우쳤다.
엄마는 나와 함께 미국으로 왔지만, 한국인이었기에 미국 문화를 나에게 직접 가르쳐줄 수 없었다. 나는 경험과 체벌, 그리고 선생님을 통해 미국을 배워갔다.
처음 체벌방에 들어간 날은 감기에 걸려 약을 먹고 있을 때였다. 점심을 먹은 뒤 평소처럼 약을 꺼내 먹었는데, 미국 친구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너 그러면 안 돼”라고 했다. 이유는 말해주지 않았다.
어느 날 한국인 유학생 친구가 참다못해 내게 일침을 놓았다.
“야 이 멍청아, 약은 티 안 나게 먹어야지. 그렇게 먹으면 미국에선 큰일 나.”
왜 나쁜지 묻기도 전에 그 친구는 설명을 끊고 자리로 돌아갔다. 미국 친구에게 묻고 싶었지만 영어가 안 되던 때라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때 상황을 지켜보던 선생님이 나를 불러 counseling이라고 적힌 작은 방으로 데려갔다. 널찍한 책상과 서로 마주 보는 의자가 있는 상담실이었다.
선생님은 나를 의자에 앉힌 뒤 나긋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클라라, 감기약을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먹은 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구나. ‘생각하는 방’에 들어가서 네가 한 행동에 대해 반성해 보렴.” 나는 서툰 영어로 “왜요?”라고 물었고, 선생님은 좋은 질문이라며 눈웃음으로 호응했다.
설명을 들어보니 문제는 약을 먹는 행위가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약물’을 노출하는 방식이었다. 미국은 마약 문제가 심각해서 중학교에서도 학생들이 몰래 마약을 하기도 한다. 내가 약을 먹는 모습을 보이면 누군가는 내가 마약을 한다고 오해할 수 있고, 반대로 마약 밀매업자들이 타깃으로 삼을 위험도 있었다. 그래서 이번 일을 계기로 한 번 더 생각해 보라며 체벌방 행을 결정했다고 했다.
체벌방은 책상도 의자도 없는 작은 독방 같은 공간이었다. 들어가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규칙은 단순했다. 방에 들어가서 선생님이 나오라고 할 때까지 혼자 생각하며 기다리면 된다. 중간에 화장실을 갈 수 있지만 그 시간은 체벌 시간에서 제외된다. 방에 들어가기 전에는 모든 소지품을 압수당했다.
선생님은 ‘30분이면 된다’고 했지만, 안에서의 시간은 따로 흘렀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기다림이 지옥 같았다. 방 안에 혼자 서 있을 뿐인데도 괜히 서러워 닭똥 같은 눈물이 똑똑 떨어졌다. 처음에는 ‘내가 감기에 걸린 게 무슨 죄지?’ 싶어 울었고, 곧 ‘오해받거나 마약에 휘말리는 게 더 큰일이겠구나’라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앞으로는 약을 눈에 띄지 않게 먹어야겠다는 결론을 거기서 내렸다.
잠시 뒤 문이 활짝 열렸다. 나한테 고생했다며 따뜻한 미소를 건네는 선생님 얼굴을 쳐다봤는데 아래쪽 입가에 허연 자국이 말라붙은 걸 애써 모른 척했었다. 내가 30분 내내 벌 받는 동안 선생님은 바깥에서 날 기다리며 깜빡 잠드신 게 분명했다.
나만 고생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그날 이후 나는 사람이 안 볼 때 몰래 약을 재빨리 입에 털어 넣었다.
체벌방은 원래 ‘grounding’이라고 불렀다. 자유를 빼앗는다는 의미라고 했다. 나는 그곳을 ‘생각하는 방’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생각을 정리하면 시간이 조금 빨리 가고, 그 생각 덕에 다시 반복되는 걸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여러 자잘한 일로 체벌방을 드나들었다. 미국 친구가 나를 심하게 놀려서 주먹으로 응징했을 뿐인데 1시간 동안 방 안에 있어야 했다. 동양인 여자라고 놀림을 당한 탓에 서러워서 그 한 시간을 거의 내내 울면서 보냈다.
아무리 화가 나도 폭력은 안 된다는 이유로 내가 1시간을 채워야 한다는 게 억울해 선생님께 항의했다. 나를 모욕한 친구는 왜 체벌하지 않느냐 물었더니 선생님은 그 친구가 부모님과 함께 교장실에 가서 따로 조치를 받을 거라고 답했다. 인종차별은 더 큰 문제라 학교가 학생 부모와 상의해서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내가 받은 벌이 오히려 가벼운 편이라는 걸 알았다.
며칠 뒤 그 친구는 부모님과 함께 나와 엄마를 찾아와 사과를 건넸다. 교장선생님은 장애를 비하하는 건 더 나쁜 행동이라며 짚어주었다. 그 친구는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았고, 나도 화난다며 주먹을 휘두르지 않았다.
지각을 할 경우에도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방식’으로 벌을 받았다. 지각생이 많아서 선생님은 방과 후에 텅 빈 식당으로 아이들을 불렀다. 식당에는 선생님과 함께 테이저건과 총을 허리춤에 찬 경찰 한 명이 서 있었다. 다수의 인원들이 모여있기 때문에 혹시 모를 돌발 상황을 막기 위해서였다.
테이저건이 가짜 아니냐는 의심은 자연스럽지만,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 딱 한 번 그 테이저건이 실제로 발사되는 장면을 봤다. 남학생 둘이 싸우다 한 명이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는데 경찰이 말려보려 했고, 흥분한 학생은 책가방에서 삼각자를 꺼내 휘둘렀다. 너무 위험한 상황이라 경찰이 테이저건을 쏴서 난동 부리는 학생을 제압했다. 그 이야기를 해주면 대부분은 납득한다.
벌을 받는 방식은 이랬다. 소지품을 전부 가방에 넣어 잠근 뒤, 선생님이 가져온 큰 바구니에 넣어야 한다. 체벌 시간을 채워야 가방을 돌려받고 집에 갈 수 있었다. 큰 식당 안에서 나란히 앉아 있어야 했고, 옆 친구와 대화하거나 장난치면 바로 벌점이 붙었다. 벌점이 3개 쌓이면 다음날 또 와야 했다.
방과 후 1시간 30분을 학교에 남아 있어야 했는데, 열다섯 살 나에겐 너무 길었다. 친구들이랑 붙어 있으니 장난치고 싶어 온몸이 근질거렸다. 눈이 마주치면 ‘야 너도 힘들지?’라는 눈빛이 통하는 것 같았다. 웃음을 참지 못해 킥킥거리다 선생님께 들켜 혼나곤 했다.
지각에도 ‘급’이 있었다. 세 번 이상 지각하면 두 시간, 여섯 번 이상이면 세 시간을 남아 있어야 했다. 나는 더 이상 그 시간을 날리고 싶지 않아서 매일 아침 졸음을 억지로 이겨냈다. 학교는 나에게 ‘신중히 움직여야 살아남는다’는 교훈을 줬다.
어린 내가 느낀 미국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원더랜드처럼 어디로 어떻게 굴러갈지 모르는 세계였다. 한순간은 평온하다가도 다음 순간엔 규칙이 통하지 않았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도 그 감각은 계속됐다.
위험은 늘 예고 없이 나타났고, 학교 밖은 말 그대로 생존의 영역이었다. 학교 안에서 경찰이 테이저건을 쏘는 걸 봤다면, 밖에서는 그보다 더한 일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었다. 동시에 어딘가 위화감이 느껴지는 이상한 일들도 많아서, 미국은 늘 미지의 세계처럼 느껴졌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나는 단짝들을 사귀었고, 방과 후엔 항상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다. 학교가 끝난 뒤 엄마가 집에 돌아오기 전까지가 내 자유시간이었다. 미국 체류 조건 중 하나가 ‘미국 사회에 어느 정도 기여할 것’이었기 때문에 엄마도 학교에서 돈을 내고 공부를 해야 했다.
엄마는 한국에서 미술교육학과를 졸업한 경험을 살려 조교 일을 겸했다. 일급을 받으면서 공부도 하고 학점도 딸 수 있어 일석삼조였다. 어느 날 나는 엄마를 기다리며 친구랑 놀다가 장난 하나를 떠올렸다.
어릴 때 한 번쯤은 해봤을 법한 장난, ‘벨 누르고 튀기’. 미국이라고 이런 게 다를 리는 없다. 친구가 먼저 벨튀를 제안했고, 우리는 빠르게 합의했다. 질 나쁜 짓인 걸 알면서도 골탕 먹이는 재미에 눈이 반짝였다.
계획은 간단했다. 아파트 2층 끝에서부터 벨을 하나씩 누르고 도망치는 것. 엘리베이터가 없는 목조 건물이라 계단에서 잡힐 위험을 미리 계산해 두었다.
위층부터 차례로 벨을 눌렀는데 어떤 집은 문을 열지 않았고, 어떤 집은 욕설을 퍼부었다. 또 어떤 집은 할머니가 문을 열고 우리를 보며 피식 웃었다. 우리는 각기 다른 반응을 구경하며 웃었다.
1층으로 내려와 마지막 집 벨을 누르는 순간 일이 터졌다. 문이 열리자마자 무서운 아저씨가 튀어나왔는데 허름한 흰 티셔츠와 작업복 바지, 화려한 카우보이 부츠, 그리고 손엔 크고 길쭉한 갈색의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깜짝 놀라 뒤로 자빠져 아스팔트 바닥에 두 손을 대고 고개를 들었는데 야생동물 사냥에 쓸 법한 오동색 라이플이 아저씨의 손에 들려져 있는 광경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아저씨는 라이플을 우리에게 겨누고 으르렁 거렸다.
“한 번만 더 이딴 장난을 치면 벌집으로 만들어버린다!”
목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아파트 단지에 있는 사람 모두가 다 들을 정도로 쩌렁쩌렁 울렸다. 친구들은 정신없이 흩어져 도망쳤고, 나는 거의 오줌을 지릴 뻔했다. 도망치는 내내 뒤에서 “이 생쥐 같은 놈들아, 다시는 얼씬도 하지 마라!”라는 고함소리와 함께 낮고 거친 웃음소리가 내 양심을 후벼 팠다. 그날 이후 나는 벨튀를 완전히 그만두었다. 내 인생 첫 벨튀였지만 동시에 마지막이 되었다. 다음날 친구들도 다시는 안 하겠다고 했다. 우리 모두에게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내가 살던 텍사스에서는 총기 소지가 합법이었다. 집주인이 집에서 위협을 느낄 경우 가해자에게 총을 쏘는 것은 범죄가 아니다. 스스로를 보호하는 정당방위기 때문이다. 그런 곳에서 벨튀 때문에 엽총까지 들고 나왔다는 사실은 평생 텍사스에서 자란 내 친구에게도 충격적이었다.
우리는 그를 ‘사냥꾼 아저씨’라고 불렀다. 동네 주민이라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매년 핼러윈 저녁마다 사탕을 받으러 다닐 때도 그 집 앞에 서면 다리가 저렸다. 아저씨는 사탕을 쥐여주며 내 손을 꼭 잡았다.
“요즘은 착한 아이로 지내고 있나 보구나.”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죄책감이 올라왔다. 우리는 벨튀 이후로 그에게 단단히 찍힌 기분이었다.
어느 날 동네 할머니에게 ‘사냥꾼 아저씨’ 이야기를 꺼냈는데 할머니는 그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 우리를 귀여워서 봐준 거라고 했다. “그게 그 사람 방식”이라며, 대신 그런 장난은 이제 그만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진짜 나쁜 사람을 만났으면, 너희는 벌집 되는 걸로 끝나지 않았을 거야. 눈을 떴을 땐 이 세상에 없었겠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그 아저씨가 오히려 좋은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다. 총을 들고 나왔지만 실제로 쏘지는 않았으니까. 아저씨는 우리에게 인생을 알려주려고 했던 것 같았다. 벨튀가 왜 위험한지, 사람을 장난으로 건드리는 게 얼마나 무모한지 나는 시간이 갈수록 더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어린 시절, 나는 늘 느리게 주변을 살피고 조심스레 움직였다. 겉으론 둔해 보여도, 마음속 발톱은 언제 꺼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나는 위험한 나라에서 생존하는 법을 일찍이 배웠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얻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건 다음 장에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