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그는 처음부터 내 말투가 낯설게 느껴졌다고 했다.
어휘력 문제라고 믿었고, 나보고 한국어 공부를 더 하길 추천하곤 했다. 우리는 3년 넘게 이 문제로 싸우다가 결국 커플 상담까지 받게 됐다. 상담사는 싸움의 원인이 문화 차이 때문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어휘력 문제가 아니니 핑계 대지 말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속이 시원했다. 하지만 선생님의 설명에는 한계가 있었다. 대화 심리상담 전문가일 뿐 인류와 문화를 공부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명쾌한 설명을 듣지 못했다.
다행히 오빠와 나는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서로 문화가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불편하다 느낄 때마다 적극적으로 원인을 찾았다.
내가 짧고 명확하게 말할수록 오빠는 그것을 평가나 지적으로 들었다. 나는 시간을 아끼려고 결론부터 말했는데, 오빠 눈에는 ‘딱 잘라 말하는 사람’으로 보였다. 미국에서는 정확한 단어가 오해를 막는 장치지만, 한국에서는 감정이 실린 말처럼 들릴 수 있다. 그래서 내 문장은 그에게 늘 조금 세게 들렸던 모양이다.
오빠는 내 말 속의 의도보다 문장과 단어를 먼저 보고 해석했다. 그렇다 보니 대화할 때마다 주제가 틀어졌고, 나중에는 ‘우리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라는 지점까지 다다르기 일쑤였다. 상대방의 말을 한쪽으로만 해석하고 다른 걸 바로잡으려는 마음이 문제였다. 여기서 말하는 방식의 차이는 어느 쪽이 더 낫다는 의미가 아니다. 나는 미국에서 사고방식을 흡수했고, 오빠는 한국에서 규칙을 배웠을 뿐이다. 다만 한국어로 말할 땐 한국정서에 맞춰야 하는 걸 나는 미국정서 그대로 적용하는 바람에 원어민인 그의 눈에는 유독 많이 밟힌 느낌이다. 어쩐지 오빠가 꿋꿋이 버티더라.
어느 날, 오빠에게 받은 문자 메시지로 인해 작은 오해가 싹트기 시작했다.
“이번 주말에 네가 좋아하는 곳 가고 싶은데… 그날 내가 낮에 좀 바빠. 회사에서 갑자기 일이 들어왔어.”
“우리 주말 저녁에 만나는 게 낫겠네. 어때?”
“그래, 알겠어. 혹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난 오빠가 ‘낮에 바쁘다’ 했으니까 저녁으로 약속 시간을 옮긴 것뿐이야. 불편하게 느꼈다면 바로 말해줘.”
“그건 아닌데… 저녁이 제일 좋긴 한데 너무 딱 잘라 말하니 당황스럽네.”
나는 시간을 중요시 여기는 나라에서 자랐다. 그래서 사람과 대화할 때 중요한 맥락이나 핵심을 먼저 말하는 화법이 두드러진다. 상대의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다. 미국에선 “결론부터 말해줘”라는 말이 예의로 통한다. 우리가 나눴던 대화에서 오빠가 본론을 아직 안 꺼냈는데 내가 결론을 먼저 던지는 바람에 이와 같은 오해가 생긴 것 같다. 한국은 전체 맥락보다 최종 판단의 뉘앙스에 더 민감하기 때문이다. 말이 단정적으로 나오면, 상대방이 이미 입장을 굳힌 것처럼 느껴진다. 미국인에게는 요약이 배려지만 한국인에게는 딱딱한 말투로 들리는 모양이다.
오빠는 대화뿐만 아니라 내 얼굴 표정과 제스처를 읽는 걸 어려워했다. 나는 감정을 숨기지 않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아무 때나 불만을 쏟아내진 않는다. 미국에서 표현하되 상대를 불편하게 하지 말라는 규칙을 배웠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은 감정을 조절하는 쪽에 더 익숙해 보인다. 그래서 내 솔직한 표정이 한국 사람 눈에는 과하게 느껴지는 듯하다.
주문한 음식이 잘못 나왔을 때도 내 표정 때문에 오해가 생길 뻔했다.
“어… 이거 우리가 주문한 게 아닌데?”
말하는 순간 내 표정이 확 굳었다.
내 표정을 보고 눈치를 살피던 오빠가 몇 마디를 꺼내기 시작했다.
“괜찮아. 일단 차분하게 생각하자.”
“아무 문제없어. 우리 둘 다 돈 냈잖아. 바꿔달라고 말하면 돼. 내가 말할게.”
“너무 바로 말하면 직원이 당황할 수도 있어.”
“내 말 들어봐. 화내는 게 아니야. 그냥 사실을 말하는 거야.”
나는 직원을 불러 음식과 영수증을 보여주며 정중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아… 이렇게 말하는 거구나. 너 표정만 보면 뭔가 강하게 말할 줄 알았어.”
“그랬구나. 걱정 마.”
상황을 이해하는 시각도 서로 달랐던 거다. 나는 요약 → 필요한 맥락 순으로 상황을 파악했고, 오빠는 맥락 → 감정 → 결론 순으로 늘어놓았다. 나는 주문이 잘못됐으니 메뉴부터 다시 바로잡는 게 먼저였고, 오빠는 직원들이 기분 나쁘지 않게 상황을 원만하게 해결하는 게 더 중요했다. 상황의 핵심을 빨리 파악하려는 나와 목적과 인간관계를 동시에 잡으려는 그는 대화의 기초부터 달랐다.
어느 날 오빠가 직장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줬을 때, 이 차이를 확실하게 느꼈다.
“…그래서 그 동료가 다른 사람한테도 그런 식으로 말하더라. 근데 내가 거기서 뭐라고 해야 하나 고민이 돼.”
“잠깐만, 말하려는 핵심이 어떤 거야?”
“너무 퉁 치는 거 아냐?”
“오빠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내가 알아야 반응을 해주지. 이야기의 핵심을 알아야 하는데 내가 파악하기 어려워. 그래서 물어본 거야.”
“오케이. 그럼 핵심부터 말해볼게. 오늘 팀에서 의견 충돌이 있었어.”
“좋아. 이해했어. 계속 말해줘.”
이건 각자의 뇌 구조가 달라서 생긴 상황이다. 미국 사람들은 선형 사고에 익숙하고 나 역시 생각 방식이 매우 단순하고 명료한 편이다. 생각을 단계별로 한다고 보는 게 좋다. 그래서 “지금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를 먼저 밝혀야 ‘이 사람이 뭘 말하려는지’ 알 수 있다. 필요한 설명을 덧붙이는 건 그다음 단계다. 미국에서 자주 쓰는 TL;DR(Too Long; Didn’t Read)를 보면 핵심을 먼저 내놓는 사회적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 한국사람은 정보 처리 속도가 빠르고 오빠도 그렇다.
여러 가지 상황을 늘어놓아도 단숨에 인간관계와 분위기를 파악해 내는 선물 같은 재능을 갖고 있는데, 그는 그런 능력을 내세우지 않을 만큼 겸손하다. 한국에서는 대화를 나눌 땐 상황을 먼저 풀어내며 상대가 감정과 맥락을 함께 따라오도록 만드는 방식이 자연스럽다. 상황을 공유하는 시간 자체가 관계를 조율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결론부터 말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가 “왜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하지?” “내 감정이나 맥락은 중요하지 않다는 건가?”라는 생각이 드나 보다.
오빠는 내 제안을 지적처럼 느꼈고, 나는 긴 설명 사이에서 핵심을 추려내느라 피곤했다. 나 역시 오빠가 “말만 하는 타입인가?” 하고 오해했던 순간이 있었다. 오빠가 대학원 다닐 때 논문이 잘 풀리지 않아 어려움을 토로했을 때도 그랬다.
“오빠, 목차부터 먼저 정한 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건 어떨까? 이게 더 편할 수도 있어. 내 경험상 규칙을 정하면 글 쓰는 속도가 빨라지더라고.”
“네가 한 말… 내가 제대로 못해서 그렇다는 느낌이 들어서 좀 그래.”
“아 그래? 오빠가 몇 주째 헤매길래 좋은 방법 하나 던진 거야. 너를 평가하려는 말 아니야.”
“음… 알아. 근데 종종 ‘지적’처럼 들려서 기분 나빠.”
“오케이. 그럼 다음엔 ‘도움 필요한 부분 있어?’라고 먼저 물어볼게. 근데 오빠도 듣는 내 입장을 생각해야 해. 오빠가 몇 주째 나한테 계속 낙방 중이라고 불만을 토로했잖아? 난 오빠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길 바랐어. 교수님이 과제를 다시 해오라는 건 오빠 스스로 문제점을 찾아보라는 뜻이야. 오빠가 계속 방황하니까 내가 방법 하나를 던져준 것뿐이지.”
“아… 어렵네.”
내가 가지고 있는 문화 때문에 이런 오해가 생긴 모양이다. 솔직함은 아무 말이나 거칠게 내뱉는 거랑 다르다. 미국에선 핵심은 직접 말하되, 상대를 불편하게 하지 않도록 톤을 부드럽게 조절하는 방식을 높이 평가한다. 나도 그런 방식으로 훈련받았다. 도우려고 했는데 오빠에게는 능력을 평가하는 말처럼 들릴 때가 많았던 것 같다.
오빠는 내가 필요 이상으로 올곧다 느꼈고, 나는 오빠가 너무 장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설명 방식은 언제나 정보가 많아서, 듣다 보면 과부하가 왔다. 나는 말을 들을 때마다 자동으로 중심 메시지를 뽑아내려는 경향이 있어서, 설명을 들으면 “그래서 의미는 뭐지?”라는 물음이 먼저 튀어나왔다.
미국인은 항상 직설적으로 말할 거라는 오해도 내 억울함에 한몫했다. 미국 역시 돌려 말하기를 잘하지만, 방식은 한국과 다르다. 미국은 긍정적인 말을 정중히 돌려서 말하지만 부정적인 말도 기분 나쁘지 않게 전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모든 게 다 정중함 속에서 포장되어 있기 때문에 한국보다 격식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하는 현실이다. 어느 나라 한쪽이 더 낫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내가 미국에서 이렇게 배워왔다는 말이다. 한국의 대화 방식은 미국과 다른 강점을 가지고 있다. 특히 인간관계를 섬세하게 읽어내는 능력은 한국이 훨씬 뛰어나다. 어느 쪽이 옳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서로 다른 규칙을 익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나는 시간을 아끼려 했고, 오빠는 감정을 맞추려 했다.
둘 다 배려였지만, 방식이 달라서 서로를 오해했다.
오해가 생기면 대부분은 거리를 두지만, 우리는 멀어지지 않았다. 오해가 생길 때마다 대화를 멈추지 않았고, 서로의 방식을 확인하며 조금씩 맞춰 갔다. 문화 차이는 성격처럼 자연스러운 차이일 뿐, 누구의 방식이 틀렸다는 뜻은 아니다. 다른 문화에서 온 두 사람이지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 마음이 떠나려는 순간에도 다시 돌아오게 만들었고, 덕분에 지금도 함께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우리가 다르게 말한 이유는 말투 때문이 아니었다.
문제를 이해하는 속도 자체가 달라서 그랬다.
오빠는 상황이 벌어지면 즉시 행동에 옮기는 꿀벌 같은 사람이었고, 나는 한 박자 쉬어가며 전체를 보고 움직이는 나무늘보에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