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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코드로 같은 세상을 본다

5화

by 명형인


나와 그이는 대화를 해석할 때마다 서로 다른 문화 코드의 영향을 받았다. 언어와 사회, 공동체를 이루려면 함께 공유하는 코드가 중요한데 우리는 그게 없었다. 다른 나라에서 건너와 정착한 사람들을 이방인이라고 부르는 이유기도 하다. 외국인을 foreign이라고 부르는데 ‘본인이 속해 있는 곳을 떠나 타지에 살고 있는’이란 뜻이다. 딱 우리의 상황을 표현하는 단어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이방인이었다.


캠브리지 영어사전에서 정확한 의미를 찾아보면 ‘belonging or connected to a country that is not your own’으로 나온다. 내가 알기론 미국에선 foreign이라는 단어를 잘 안 쓴다. 사람을 배척하는 부정적인 느낌이 들 수 있는 단어다.

그리고 사회·정치적으로도 꽤 민감하게 받아들여진다. 국제사회에선 이 단어를 잘못 쓰면 ‘넌 우리 공동체에 들어올 수 없어. 너네 문화나 따라라’라는 뉘앙스를 줄 수 있어 조심해야 한다. 나 역시 미국에서 지낼 때 이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타국에서 살고 있는 건 사실이기 때문에 해당 단어가 차별이라 보기 어렵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그러나 영어 단어가 갖고 있는 의미가 매우 섬세하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Country는 한·영 사전에서는 나라를 뜻하는데 영어권에서는 무려 세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1. 법령에서 정한 국경을 따라 지정된 땅

2. 개발이 덜 되었거나, 농업 활동 중심 또는 자연 그대로 보존된 지역

3. 특징이나 특색을 가지고 있는 지역을 일컫는 말


이 세 가지 정의를 단순하게 보면 큰코다친다. “타지”가 나라가 될 수도 있고, 지방이나 특정한 문화·역사적 특징을 가진 지역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Foreign은 ‘내가 속한 곳을 떠나 다른 곳에 살고 있다’는 맥락을 전하기 위한 단어다. 이 때문에 Country의 정의가 세 갈래로 나뉘면 ‘이방인’이라는 표현도 쉽게 문화 인식을 건드릴 수 있다.


이 때문에 미국에선 학문적인 목적 이외엔 foreign을 잘 쓰지 않는다. 사전적인 정의의 세 번째 항목을 보면 왜 이 단어가 위험한지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이방인이라는 단어를 ‘자신의 문화권을 떠나 새로운 장소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빠에게 이 사실을 알려줬더니 “참 복잡하게 산다”는 답변을 받았다. 복잡한 게 맞다. 오빠가 말을 참 잘한다. 내가 영미 문화를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대화할 때마다 코드가 달라 말이 산으로 가기 쉬웠다.


우리는 다른 코드 속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겪었다. 코드가 같았다면 서로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지 못했을 것 같다.


우린 무려 6년을 만났다. 연애하면서 우리는 대화를 중요하게 여겨 자주 소통했다. 그만큼 문화 코드를 체감하는 순간도 점점 늘어났다. 처음에는 서로 성격이 다른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이것이 성격이나 성향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된다. 나는 한국의 정서가 담긴 인삿말이 특히 어려웠다. 한국에선 “밥 먹었니?”라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다. 오빠도 그 사람들 중 하나였다.


“밥 먹었어?”

“응, 먹었어. 서브웨이 샌드위치 먹었는데 꽤 괜찮더라. 오빠는?”

“어… 그냥 물어본 건데.”

“어? 그래서 대답한 거야.”

“아니, 그렇게 자세히 말할 필요는 없어.”


밥 먹었냐는 질문을 듣고 처음에는 내 생활이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 줄 알았다. 이 질문을 자주 듣다 보니 내가 궁금해서 물어본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밥 먹었냐는 질문에 난 ‘오늘 이런 거 먹었다’라는 답변을 줬는데, 대부분이 들추지 말아야 할 사생활을 들은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오빠도 같은 반응이었고, 그때는 뭐가 잘못된 건지 전혀 몰랐다.


한국의 “밥 먹었어?”는 인사 말문을 여는 장치다. 감정·안부·정서적 거리를 가볍게 확인하는 기능이 크고 정보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래서 뭘 먹었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오빠가 그것을 그냥 생존 확인에 가깝다고 설명해 준 이유를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미국식 대화 규칙에선 질문 = 정보 요청이기 때문에 상세한 답변이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나는 오빠에게 구체적인 상황을 말해준 것이다. 상대방은 정보 요청으로 물어본 게 아니었기 때문에 내 대답을 듣고 당황한 것 같았다. 알려줬는데 반응이 예상 밖이라 나도 당혹스럽긴 마찬가지다.


질문이 같은데 기능이 다르다. 그이는 “대화 시작 신호”로 던진 말이고, 나는 “답변을 달라”로 이해했다. 말꼬를 틀고 싶었는데 오히려 말문이 막히니 서로 어쩔 줄 몰라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지금은 능숙해져서 밥 먹었냐는 문자를 받을 때마다 곧바로 오빠에게 영상통화를 건다. 내가 영상통화를 걸면 아주 좋아하기 때문이다. 가끔은 내가 오빠한테 밥 먹었냐고 물어보는데 그때마다 기분이 좋아 보인다. 이게 내가 그 사람을 대하는 방법이다. 잘 지낸다고 나에게 웃음으로 답하면 작전 성공인 거다.


우리는 유머 코드도 달랐다. 오빠가 종종 나에게 웃긴 영상을 보내는데 대부분이 일본 개그 영상이다. 우리 둘 다 청각장애인인데 그는 나보다 더 안 들린다. 그래서 비교적 이해하기 쉬운 영상이나 자막이 달려 나온 영상을 많이 보는데 일본 개그는 자막과 함께 편집된 영상이 많아 유독 자주 보는 것으로 추측된다. 한국 코미디 영상은 자막이 없어서 아쉽다고 오빠가 나에게 몇 번 말한 적이 있었다. 한국 코미디는 TV로 자막 기능을 사용해 시청하는 편이다. 비교적 공유하기 수월한 일본 개그 영상 덕에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많았는데 그중 하나가 유머 코드가 달라서 벌어진 웃픈 일이었다.

웃음의 방식도 우리 둘 사이에서 큰 차이가 났다. 이 차이를 이해하려면 우리가 좋아하는 ‘웃음의 방식’ 자체를 먼저 들여다봐야 한다.


(일본 개그 영상 시청 중)

“이 장면 정말 웃기지 않아?”

“으… 저 사람 넘어졌잖아. 정말 아파 보이는데.”

“그냥 웃기잖아? 난 빵 터졌어.”

“웃기는지는 잘 모르겠어. 저 사람은 미스터 빈이 아니잖아.”


“아니 왜 갑자기 미스터 빈이 나와?” 많이 답답했던 오빠가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나도 답답해 죽는 줄 알았다. ‘웃기지 않는 걸 왜 자꾸 웃기냐고 물어보네!’


유머 코드에도 문화 차이가 있었다. 한국식 유머는 몸 개그, 과장, 민망함 같은 슬랩스틱이 강하다. 일본식 유머도 비슷한 특징이 있어 오빠가 좋아하는 것 같다. ‘슬랩스틱’은 원래 두 개의 얇은 나무 조각을 붙여 소리를 내는 장치를 가리킨다. 캐스터네츠와 비슷한 구조다. 예전 영화에서는 서로 치고박는 장면이나 관객의 웃음소리를 표현하기 위해 이 장치를 흔들었다. 지금은 과장된 동작이나 소리로 웃음을 유발하는 방식을 통칭하는 의미로 쓰인다.


반대로 미국식 유머는 말맛 · 아이러니 · 캐릭터 기반이 중심이라, 누가 넘어지거나 다칠 뻔한 장면은 쉽게 웃음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슬랩스틱을 사용해서 웃기길 원한다면 고도의 기술과 연출이 필요하다. 찰리 채플린이나 미스터 빈이 제일 좋은 예시다. 캐릭터 자체를 우스꽝스럽게 만들어 일관성을 유지하는 방법도 있다. 아니면 상황 전개 속에서 자연스럽게 몸 개그가 나올 수 있도록 이야기의 연관성이 있어야 한다. 연출도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미국은 이야기에서 맥락과 전개를 많이 보기 때문에 뜬금없는 사고 연출은 시청자에게 공포감을 주기 쉽다. 나 역시 사람들이 갑자기 넘어지거나 다치는 장면을 개그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둘의 ‘웃음 공식’은 다르다. 이번 일을 통해 오빠는 한국에선 익숙한 슬랩스틱 코드가 미국인의 눈에는 다소 위험하거나 과도하게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나도 일본 개그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오빠는 재미있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도 일본 개그를 좋아하는지 잘 모르지만 오빠는 일본 개그도 잘 맞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미스터 빈’이나 ‘나 홀로 집에’ 같은 영화를 함께 보았는데 그 선택은 꽤 효과적이었다. 유머 코드가 달라도 서로 함께 웃는 건 불가능하지 않았다. 함께 방법을 찾으면서 맞춰 나갔다.


코드가 달라서 그런지 그는 나를 ‘영원한 탐구 대상’이라고 불렀다. 문화 코드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르다며 알아내는 재미가 있단다. 오빠 눈에는 내가 흥미로웠나 보다. 무슨 실험체도 아니고 왜 오빠의 탐구 대상이 되어야 하냐고 반문을 했는데 끝까지 부정할 순 없었다. 나도 오빠를 몰래 관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쩜 이렇게 다르지?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오빠 머릿속에 직접 들어가는 상상을 많이 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내가 어떻게 느껴질지 궁금했던 적도 많았다.

문화가 다르면 상대방이 이상한 거라고 콕 집어 말하기 어렵다. 내 기준에선 분명 이상해 보여도, 상대방에게는 지극히 평범할 수 있다는 사실을 머리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생판 남 같으면 ‘그 나라 사람들은 원래 그래’라고 넘어갈 수 있는데 우린 남이 아니었다.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는 마음으론 불편하다 느껴도 머리로 생각하면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


이번에는 그이의 관점에서 이야기할 차례다. 오빠랑 함께 소통하면서 쓸 예정이라 이 글의 취지가 왜곡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오빠 눈에는 내가 어떻게 보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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