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말했다, 넌 너무 어려워

13화

by 명형인

중학교 2학년부터 12년을 미국에서 살다가 다시 돌아오니 참 많은 것들이 변해있었다. 변한 건 내가 밟고 있는 이 땅뿐만 아니었다. 나 또한 어린 시절 기억 속의 모습과 멀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한국에선 분명히 사람들과 잘 지냈던 것 같은데. 나는 사소한 오해도 부르지 않고 사람들과 둥글게 지내는 평범한 아이로 자랐다. 그런 내가 한국인을 보기 어려운 텍사스의 작은 깡촌 마을에서 중학교를 다니게 될 줄 몰랐다. 그리고 내가 이 생활을 이토록 좋아해서,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될 줄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때 당시 내가 살았던 텍사스 주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는 한국인이 적었다. 내가 다녔던 학교에서 한국학생들은 많아야 3-4명 정도 되었는데 오히려 멕시코에서 넘어온 학생들이 훨씬 많았다. 그 정도로 내 나라 사람은 매우 희귀했다.


언어도 통하지 않고 도와줄 사람도 없는 미국의 중학교에서 첫 친구를 만들려고 참 아등바등했던 기억은 아직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에 선하다. 그리고 친구들이랑 공유할 수 있는 관심사나 이야깃거리는 좀처럼 쉽게 나오지 않았다.


힘들었던 기억 때문일까, 내 일생의 모든 노력이 다 이 시절에 몰려 있었던 것 같다.


한국에서는 어린아이들을 겁 주려고 망태할아버지 이야기를 꺼냈고, 빨간 마스크가 학창 시절 때 엄청 화젯거리였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하면 친구들이 당연히 공감할 거라 생각했다. 친구들과 함께 깔깔거리고 벌벌 떨며 공감할 수 있던 이야기는 새로운 땅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외국의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망태 할아버지가 도둑이냐며 되묻고 빨간 마스크는 약을 하고 스스로 얼굴을 찢은 여자가 아니냐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모습은 무지 낯설었다.


이해하는 방법은 달랐지만 그거 참 무섭다는 반응만은 같았다. 참 미적지근한 반응이 아닌가. 어린아이에게는 너무 가혹한 순간이었다.


내 친구들은 대부분 미국에서 만난 친구들이란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녔을 땐 고학년으로 올라가면서 내가 청각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했다. 그땐 2000년도라서 아직 장애인식이 좋지 못한 시절이었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오래가는 친구들이 손에 꼽을 정도로 몇 안된다.


그때 아마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 있었다면 지금은 달라질지 모르겠지만, 한국에서는 시간에 매우 인색했다. 정신없이 공부를 하다 보니 훌쩍 미국행 비행기를 타는 날이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친구들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게 무방하다.


앞으로 내가 언급할 친구들은 앞에 “한국”이라는 명사가 붙지 않는 한 미국에 살고 있는 애들이니깐 말이다.


내가 내 친구들과 잘 통하는 이야깃거리는 ‘주정뱅이 잭’과 ‘침대 밑의 괴물’ 이야기다. 무섭고 으스스한 날씨에 밤길을 걸어야 할 때 ‘잭’이 튀어나올 거 같아 무섭다는 말이 통했다. 잭은 지옥에서 버젓이 풀려나와 악마를 골탕을 먹이고 살려달라고 빌게 만든 아주 교활하고 고약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핼러윈 때 흔히 보이는 호박머리인 잭-오-랜턴이 바로 ‘잭’이다. 그런 무시무시한 사람과 밤길에 마주치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잠자다 실수하는 바람에 엄마한테 혼났을 땐 ‘침대 밑에 살고 있는 괴물’이 아마 오줌을 흠뻑 뒤집어쓰고 더러워서 도망갔을 거라는 친구의 농담이 충분히 먹혔다. 내 침대 아래에 살고 있는 괴물이 도망갔다는 말은 방에서 혼자 잠자야 했던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어두컴컴한 방에서 엄마 없이 혼자 자는 게 어릴 땐 싫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매번 잠자리에 실수를 하진 않았다. 엄마의 회초리가 더 무서웠기 때문이다. 새롭게 배운 이야기들은 미국 문화가 진하게 배어 있었다. 이렇듯 나는 점점 미국의 삶과 가까워졌다.


나는 조금씩 미국유머를 배워갔고 대학교에 들어갈 즈음에는 말 한마디로 내 친구들이 재밌다며 웃었고 교수님들도 나를 유쾌한 사람으로 평가했다. 대학교 졸업할 때 받은 교수님의 추천서를 보면 세 가지 단어가 꼭 들어갔다. “Confidant”, “Straightforward” 그리고 “Humorous.” 즉, 당당하고 시원하며 재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어떻게 보면 미국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요소를 모아둔 표현이다. 이 때문에 나는 인간관계를 맺으면서 마음을 졸이거나 줄타기할 일이 거의 없었다. 무례하게 대하거나 불쾌한 경우는 몇 번 있었지만, 내가 먼저 행동에 옮기면 그만이었다.


내가 먼저 정중하게 대한다면 돌아오는 것은 비교적 많았다. 이보다 편한 인간관계는 없을 것이다. 내가 만끽할 수 있는 평화는 그리 길지 않았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2년 내내 구직활동을 했는데 인생은 거저 주는 게 없었다. 부모님은 미국에서 좀 더 버텨보길 원했고 나는 하던 것을 과감하게 접어 다른 길로 가고 싶었다. 오래 버텨봐도 미국은 비자 만료일이 다가오는 이민자에겐 냉정했기 때문이다. 나는 27년 만에 내 고국을 다시 밟게 되었다. 내가 살아온 삶의 방식은 그때부터 폭풍우를 맞이한 나무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참 길고도 긴 시간이었는데 다시 그때의 감각을 느낄 줄이야.


한국에서의 두 번째 생활의 첫 소감은 전쟁터에서 집으로 막 돌아온 군인이 된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온 부모님의 집은 편안하면서도 위화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반가운 얼굴을 보니 무척이나 좋았다. 가족들이 환영하며 나를 위해주는 따뜻함이 느껴졌다.


이 좋은 분위기는 내가 걸어온 발자취를 덮어주기에 역부족이었다. 이 따뜻함 속에 쉬이 숨어있는 내 작은 마음이 조용히 반발하기 시작했다.


안 보이는 곳에서 작은 충돌들이 이어졌다. 이건 내가 걸어온 길에 대한 결과다. 이로 인해 나는 소중히 여겨야 할 가족들과 웃는 날 보다 근심하고 얼굴을 붉히는 날이 늘어났다. 익숙하게 느껴야 할 장소에서 낯섦이 공존했다.


사람들은 나에게 한 마디씩 말했다. “넌 너무 어려워.”


나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 이건 사실 나도 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한국사람들은 친해지기 어려워.” 내가 그들에게 이 말을 하면 상대방은 어떤 얼굴을 할까 상상해 봤는데 시도해 보는 건 관뒀다. 한 번은 좀 가까워졌다고 느꼈던 한국친구에게 살짝 뉘앙스를 줬는데 한국은 이미 선진국이고 최고기 때문에 네가 너무 안 좋게 보는 것 같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K-콘텐츠로 1위를 쓸어 담는 한국에서 들을 소리는 아니었다. 실제로 내가 그 이야기를 했더니 친구에게 또 한 소리를 들었다. 한국에 대해 좀 더 자신감을 가져도 될 법한데, 문화가 다르단 이유로 친구사이가 갈라질 바에는 조용히 사는 게 나았다.


내가 겪은 차이점의 몇 가지 일례를 들어보자면, 칭찬부터 대화 주제까지 문화의 간극은 매우 컸다. 내가 상대방을 칭찬할 땐 매우 구체적으로 칭찬하기 때문에 보이는 것부터 그 사람의 행동이나 잘하는 장점을 칭찬의 재료로 삼는다. 그 사람이 손재주가 좋아서 요리를 잘한다면 “너는 솜씨가 좋아서 요리를 대접하는 사람들 마다 극찬할 정도로 입을 즐겁게 만들어”라고 칭찬을 하는데 그럴 때마다 상대방은 몸을 배배 꼬는 듯했다. 내 칭찬이 너무 부담이 되었는지 그 친구는 어느 순간 멀어져 있었다. 나중에야 한국에서는 이런 칭찬이 부담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자랑하고 서로 칭찬을 해야 살아남았는데 여기서는 정반대였다.


대화를 할 때도 한국에선 사람들은 관계 속에서 주제를 찾는 듯했다. 보통 내가 뭘 했다고 말하면 관심이 미미한데 누구의 누가 뭘 했다카더라 하면 사람들의 눈빛이 반짝인다. 이건 내 남자친구도 마찬가지다. 이게 남에게 관심이 있기보단 호기심에 가까운 것 같았다. 오빠도 다른 사람 이야기가 들리면 몹시도 궁금해한다. 솔직히 나는 상대방이 뭘 했는지 듣고 싶었는데 다들 본인 이야기를 도통하질 않길래 심심한 날이 많았다. 내가 길을 걸어가다가 들꽃을 봤는데 너무 예뻤어 같은 이야기도 듣기 힘들었다. 내가 그 이야기를 친구에게 했더니 건조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라. “그게 뭐?”


공감이 되어야 하는데 통하지 않는 부분이 많았았던 건지 한국살이 초반의 인간관계는 그렇게 좋지 못했다.


만난 사람들과 멀어질 때마다 나는 관계에 목을 메지 않았다. 나는 인연을 받아들이는 쪽에 가까웠다. 정신 차려보니 얼음같이 냉정한 인간으로 소문이 난 적도 있었다. 칭찬은 세세히 해주지만, 좀 아니다 싶은 관계에는 에너지를 크게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온 다른 나라에서는 매우 당연한 것이어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그랬더니 일이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서 오빠가 수습하느라 엄청 고생을 했었다. 재작년에 내가 허위사실 유포로 법정고소 카드를 꺼내 들었는데 그 후로 시끄러운 일은 수그러들었다. 내가 이겼다는 소문이 쫙 나서 그런 걸까. 전처럼 사람들이 다가오진 않지만 지금은 그 조용함을 즐기기로 했다.


지금은 내 곁에 있을 수 있는 사람들이 남게 되어 평온하다.


미국에서 사람을 두루 만나며 가벼운 관계부터 시작하는 데 익숙했던 나는, 이 시간을 지나오며 전보다 단단해졌다. 이건 오빠에게도 다문화에 대한 생각이 바뀌는 큰 전환점이 되었다.


나를 어려워하는 사람들은 동시에, 내가 제일 어려워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가족을 만나면서 더 깊이 실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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