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한국인은 밥심이라는 말을 한국에 와서 많이 들었다. 내가 한국에서 만난 남자친구를 보면 그 말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아마 밥 이야기에 한국을 빼면 섭섭할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미국에서 찾기 어려운 경험들을 여기에서 모두 맛볼 수 있었다. 여러 가지 반찬들이 가족처럼 옹기종기 모여있는 아름다운 자태를 보면 눈이 즐거워진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걱정이 행복을 비웃듯 내 생각을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가 오빠랑 결혼을 하면 반찬 여러 개를 매일 만들 수 있을까?”
문제는 요리실력이 아니었다. 나는 요리를 즐기지만 한식은 실력보다 ‘지속 가능성’의 문제였다. 한번 하면 반찬 여러 가지는 기본이고 한상 차림을 위해 감당해야 할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조리하는 방식도 달랐는데 예를 들어보겠다. 고기 잡내를 뺄 때 보통은 레몬즙이나 각종 허브를 이용하는 반면에, 한국은 청주로 잡내를 날리고 한 번 더 데치는 등 과정에 많은 시간을 써야 했다. 양념은 한식의 심장이다. 요리를 단순하고 거칠게 하는 나에겐 부담이 커지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당연히 반찬은 최소 3가지를 원했고 쌀밥은 기본, 국이나 찌개를 찾았다. 실제로 나랑 결혼을 준비하면서 그이는 근심이 많아 보였다. 내 요리 스타일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라 더 했을 것이다.
난 나에게 장가 오는 오빠가 항상 짠하게 느껴진다. 내가 해줄 수 없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기에 더 그런 것 같았다. 어느 날은 그에게 된장찌개를 먹이고 싶어서 요리에 도전해 봤다. 사랑의 힘인 건지 오빠는 된장국이 맛있다며 따봉을 날렸지만 내 눈을 속일 수 없었다. 얼굴은 일자 눈썹에 눈은 게슴츠레하게 뜨면 실패의 신호다. 뭐가 부족했는지 궁금해서 오빠에게 물어봤는데 돌아온 답변은 간단했다. 원조의 맛이 나지 않는다. 서양사람이 끓인 된장찌개 같단다. 그는 딱 2%가 부족한데 정확히는 모르겠다며 내 눈치를 살살 보기 시작했다. 오기가 생겨 미역국으로 재 도전을 해보았는데 또 실패했다. 결국 인터넷 레시피의 도움을 빌렸는데 그때 처음으로 성공을 맛보아 기뻤다. 이 처럼 나에게는 식문화의 문화장벽이 높았다.
내가 이 사람이랑 결혼준비를 하면서 막막했는데, 고맙게도 오빠가 나를 적극적으로 밀어줬다. 밥심이 강한 사람이 나에게 미국요리를 해도 된다고 하니 꿈이냐 생시냐! 춤출 정도로 나에겐 엄청 큰 사건이었다. 한국살이 5년 차에 심하게 우울증이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나는 거의 폐인처럼 지냈었다. 그때 체중이 38kg까지 내려갔고 의사 선생님께 살이 더 빠지면 위험하다는 경고를 받았다. 솔직히 한식은 맛있는데 자주 먹다 보니 물렸다. 먹어야 사는데 모래알 씹는 것 같아 너무 괴로웠다. 밥보다 빵이 먹고 싶었고, 미국에서 먹던 치킨수프가 당겼다.
살이 찌지 않고 점점 말라가니 오빠도 걱정이 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는 주말마다 대구에서 새벽 기차를 타고 올라와 내 곁을 지켜줬다. 한 번은 강남역 근처에 있는 텍사스 음식점에서 저녁을 함께 했다. 그때 너무 고마웠다. 칠리수프랑 스테이크, 콘 브레드를 모처럼 먹으니 살 것 같았다. 오빠는 내가 식욕이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미국요리를 하면 좋겠다며 나를 설득했다. 그리고 외국 향신료를 직구하는 것부터 내가 외국식재료 상점에 갈 때마다 함께 해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향수병에 심하게 걸렸던 모양이다. 미국음식을 만들어 먹으니 상태가 눈에 띄게 호전되었다.
그때 우리는 앞으로 닥쳐올 식탁 위 작은 충돌거리들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나의 식탁문화는 한국과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미리 알려야 했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는 항상 모든 일을 먼저 겪고 보았다. 그래서인지 보통은 싸울 때마다 억울함을 토로하기 마련인데 우리는 미리 알려주지 않았던 것에 대한 서운함이 훨씬 컸었다. 분명 억울한 상황인데, 문화 차이로는 서로 쌍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내기도 애매했다. 화내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을 겪어본 적이 있다면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할 것이다. 우리는 문화가 다르다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쳤다.
식탁은 밥을 먹는 장소이자 서로를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현장이 되어주었다. 우리가 식사하는 식탁 위 풍경은 다른 가족들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는데, 몇 가지를 사진으로 남겨본다.
보는 것처럼 우리의 밥상은 음식의 가짓수가 많지 않다. 그럼에도 꼭 있는 건 메인 요리다. 만약 딸려 나오는 간단한 요리가 있다면 그건 곁들임 같은 거다. 많아봤자 두 가지를 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예를 들어서 메인이 치킨스프라고 생각하면 빵 한 조각은 필수로 함께 나오고, 나머지 요리는 데친 야채나 구운 옥수수 또는 바나나 두어 조각 정도로 나온다. 파스타를 하는 날에는 시금치를 잘게 으깨서 페스토처럼 낸 구운 시금치 하고 토마토, 생선 한 조각을 곁들여서 먹는다. 종종 사이드메뉴 없이 메인요리만 식탁에 내놓고 먹는 날도 많았는데 반찬의 나라에서 자란 한국인 남자친구는 그걸 묵묵히 먹어주었다.
묵묵히 먹길래 괜찮은 줄 알았는데 어느 날 오빠의 돌발 질문을 받았다. 미국에서는 원래 식사를 간단하게 하냐는 말이었다. 내가 그런 것 같다고 했는데 못마땅해한 그는 증거를 찾기 시작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유튜브를 열심히 검색하는 오빠의 모습을 보며 묘한 거리감을 느꼈다. 나는 속으로 ‘내가 말해주면 되지’ 라며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통조림을 그대로 까서 입 안으로 욱여넣는 미국기차 기내식 후기 영상을 보며 질색팔색하는 오빠를 뒤로 하고 시선을 애써 피했다. 스크린 불빛을 받아 밝게 빛나는 정수리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던 내 인내심은 결국 바닥을 보였다. 우리는 같은 식탁에 앉아 있었지만, 다른 기준표를 들고 서로를 재고 있었던 셈이다.
“오빠. 미국 가정요리가 한국에 비해 단출한 건 사실이지만 빈부격차에 따라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 달라지는 경향이 있어. 동영상을 보고 너무 일반화하지 않으면 좋겠어.”
기차 일등석 승객들에게 제공되는 식사는 빠진 채 일반석 승객들이 음식을 먹는 모습만 계속 나오고 있었다. 그 장면이 내 눈에 계속 밟혔다.
하긴, 내 요리가 오빠 눈에는 단순해 보일 수 있지. 5첩 반상에 익숙한 사람이니 너그럽게 이해할 순 있었다. 그래도 그게 이해가 안 된다며 동영상을 찾아보는 오빠의 행동을 완전히 납득하긴 어려웠다. 오빠 눈에는 나도 마친가 지였던 것 같다. 식탁에서 온 작은 충돌은 음식 가짓수만이 아니었다. 내가 요리를 상에 차리는 방법도 처음에는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내 경우에는 요리를 하면 사람들이 스스로 가져가기 좋게 뚜껑을 열어둔 채로 주방에 나란히 진열하듯이 늘어놓는다. 치킨수프를 한 날에는 수프가 담긴 냄비 뚜껑을 열어놓고 냉장고에서 으깬 감자와 설탕에 조린 당근, 각종 데친 야채를 꺼내서 전자레인지에 데운 후 냄비 옆에다 내놓았다. 큰 소리로 힘껏 오빠 이름을 부르면 저녁 식사 준비는 끝이었다.
내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오빠가 달려와서 접시에다 본인이 먹을 만큼 담아 식탁 앞으로 가져가기 때문이다. 우리의 저녁식사는 셀프 뷔페처럼 먹고 싶은 만큼 담아서 먹는 식사 풍경이었다. 여기서 오빠는 고생하면서 일했는데 왜 밥을 차려주지 않냐고 나에게 불만을 제기했다. 이게 그의 첫 번째 갈등이었다. 예비부부가 아니었다면 아마 불만으로 끝나지 않았을 터라 오히려 천만다행이었다.
처음에는 완전한 미국식으로 밥을 먹은 건 아니었다. 한국식으로 내가 직접 그릇에 밥과 음식을 담아서 식탁에 놓은 후 오빠를 불렀었다. 한국식으로 식사하면서 조금씩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는데 크게 두 가지를 꼽자면 “공정성”하고 “노동에 대한 가치”였다. 한국식으로 밥을 먹을 땐 말 그대로 눈치게임이 시작된다고 생각하며 임해야 한다. 미국과 달리 한국에서는 한 그릇에 음식을 담아 여러 사람들이 젓가락으로 집어 먹으며 한 그릇을 공유하는 문화를 갖고 있는데, 이 문화의 허점이 공정성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씹는 속도와 소화시키는 리듬이 다르다. 속도의 차이는 식탁 위에서 쉽게 드러난다. 나는 그 순간을 여러 번 겪었다. 평소에 먹는 속도가 느린 탓에 못 먹은 음식에 대한 아쉬움이 쌓여갔다. 내가 한 숟갈을 떠서 씹고 있는 동안 접시는 빠르게 바닥을 보였다. 어디론가 실려 가듯 흔적 없이 사라졌다. 공유는 평등을 전제하지만, 속도는 그렇지 않았다.
“오빠, 멈춰!”
처음에는 말로 다그쳤지만 한 접시를 공유하는 이상 말이 통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갈등은 커플 싸움으로 번지는 불쏘시개가 되었다. 오빠도 문제점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너무 맛있는 음식 앞에서는 여전히 사족을 못 썼다. 그리고 내가 항상 음식을 직접 갖다 주다 보니 그것을 너무 당연히 여기는 문제도 있었다. 마침 좋은 아이디어가 확 떠오르는 게 아닌가. 불편하면 미국식으로 바꿈 되잖아? 이 정도면 유레카 다. 겉으로는 제안이지, 해외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걸 한국에서 맛볼 수 있다는 달콤한 말을 오빠에게 건넸다. 결국 그가 한번 해보자고 넘어왔고 그때부터 미국식 밥상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항상 직접 밥상을 차리고 숟가락 젓가락을 가져다주는 대신에 자기가 스스로 직접 음식을 가져오기 시작하니 처음에는 반발이 있었지만 금세 사그라들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에 걸맞게 우리 둘은 주어진 환경에 적응했다. 무엇보다도 요리를 하는 주체가 나였고 오빠는 요리를 잘하지 못했기 때문에 식객이었다. 역할분담은 쉬웠다. 음식 가짓수가 줄어드니 요리하는 시간이 줄고 효율은 늘어났다. 그리고 각자 음식을 먹을 만큼 가져간다는 부분에서 오는 만족감이 컸다. 눈치를 보지 않고 먹는 게 얼마나 좋은 건지 아는가?
사실 오빠도 꽤 좋아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설거지는 오빠 담당이어서 식사가 끝나면 더 이상 서로 누가 뭘 했는지에 대해 말대꾸를 할 필요 없었다. 그러니 서로 편했다.
그럼에도 고향은 속일 수 없다. 음식을 잘 먹다가도 가끔 오빠가 한식이름을 잃어버린 가족을 찾듯 부르기도 한다. 김치찌개를 목 놓아 열창할 땐 내 손이 바빠진다. 스마트폰을 쓱 훑어 레시피를 빠르게 찾아야 한다. 그래서 그를 만난 후 나는 항상 깨어있다. 요즘은 밖에서 한정식을 사 먹고 오는데 이것도 방법이라 생각하니 요즘은 맘이 편하다. 내가 한국요리를 잘하지 못하니 그가 스스로 해 먹기 시작했는데, 덕분에 오빠의 요리 실력이 괄목상대하게 성장했다. 나중에 자식들 밥 걱정 안 해도 될 듯하다. 나와 오빠는 음식문화를 통해 느낀 불편함 덕분에 오히려 행동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선순환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있다면 지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식탁에 대한 자부심이 부쩍 늘었다. 어쩌면 나는 그 집에 굴러들어 온 발칙한 며느리일지도 모르겠다.
식탁 위에서 생긴 작은 충돌들은 충분히 맞춰가고 해결할 수 있었다.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었고, 멀리서 보니 그저 한 끼 식사였다.
그렇다 보니 새로운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사람에게 지켜야 할 ‘예의’의 기준이 서로 다르면?”
식탁 위에서 음식과 역할에 대한 코드 차이를 느끼다 보니 앞으로 계속 새로운 충돌이 일어날 것 만 같았다. 사람 간에 지켜야 할 규칙마저 서로 다르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서로 걱정이 먼저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우리가 해야 할 걱정은 그렇게 멀리 있진 않았다. 상견례하는 날이 코 앞으로 다가올수록 서로 간에 지켜야 할 빨간 선이 선명히 그어졌기 때문이다.
가로지르는 줄 위에 발을 딛고 뛰며 우리는 각자의 문화를 지키는 동시에 협상하는 기술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