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 참전 용사의 사랑이야기
‘누쪼’ 할아버지의 미완성의 사랑
여행은 많은 이유로 시작되고 끝난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이국적인 풍경 속으로 잠시 일탈해보는 것부터, 비즈니스출장의 명분으로 다녀오는 것까지 이유는 많다.
여행 후 사람들은 대부분 좋았던 시간을 기억한다. 아니, 좋았던 시간만을 기억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가이드로 일을 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여행을 통해 새로운 추억을 만들고, 카메라에 수 백장의 사진을 담아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어떤 이들은 남기고 간 추억을 돌아보려는 이유로 한국을 다시 찾는다.
지금 대한민국은 K-Drama와 K-Pop으로 코로나 이후에 가장 찾고 싶은 나라가 되었다고 한다. BTS의 팬들인 ‘아미’들이 코로나 상황이 나아지기 만을 기다린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리기도 한다. 그들이 바라보는 한국은 예전에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사람들과는 많이 다르다.
일을 하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가장 먼저 ‘누쪼’ 할아버지가 생각난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6.25 한국전쟁 참전용사 재 방한’ 행사에서 였다. 전쟁 후 한국이 가난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한국전에 참가했던 UN군들의 재 방한 행사가 매년 있었다. 일주일 정도의 시간 동안 발전한 한국의 모습을 보며, 젊은 날 자신들의 희생이 결코 헛된 일이 아니었음을 새삼 확인하고 돌아갈 때 눈물을 흘리며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전쟁의 기억은 깊은 상흔을 남겼기에, 어떤 사람들은 재 방한의 기회가 있어도 거부하는 일도 있다고 한다.
뉴욕에서 온 ‘누쪼’ 할아버지도 거의 60년이 지나 한국을 다시 방문했을 때는 큰 기대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한국방문 행사가 있다고 해서 신청했고, 다른 참전용사들과 무리 지어 찾아온 것이었다.
그는 이탈리아 이민자의 아들로, 자그마한 키에 익살스러운 웃음으로 사람들과 잘 어울렸다. 그러나 그에게도 가슴에 묻어 둔 이야기가 있었다. 처음에는 농담처럼 자신에게 한국 여자친구가 있었다고 이야기를 하더니 어느덧 그의 기억은 그녀를 다시 한번 만나보고 싶은 열망으로 바뀌었다.
미완의 사랑이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고 한다. 그는 한국전이 끝나고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본국으로 돌아갔으나 인생은 그의 바람대로 되지 않았다. 그 이후로 시간이 흘러 이제는 머리가 흰 할아버지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는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었고, 놀랍게도 아직도 지갑 속에 그녀의 사진을 간직하고 있었다.
전쟁과 사랑은 소설과 영화의 단골 소재가 아닌가.
키 작은 이탈리아 청년과 미소가 예쁜 한국 처자와의 사랑이야기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충분했고, 정 많은 한국사람들은 할아버지의 첫사랑 찾기에 두 손을 걷어 붙였다. 할아버지는 그 이후로도 여러 번 한국을 방문했고, 그 때마다 그녀의 소재를 찾아 기억을 더듬으며 강원도 어딘가를 찾아 헤맸다.
마치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이, 예전에 있었던 개울이며 산등성이를 떠올렸지만 이미 그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쉽게 찾을 듯 하기도 했지만, 마지막엔 아쉬움을 남기고 미국으로 돌아가길 몇 차례나 더 했었다.
이제 할아버지에게는 그녀를 찾는 일이 일생의 과업이 된 듯했다.
같이했던 사람들도 누쪼 할아버지가 과연 그녀를 찾을 수 있을까 기대 반, 혹시나 돌아가셨을까 걱정도 하며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토록 기다리던 소식이 있었다. 그녀의 소재를 찾은 것이다.
모두가 환호를 하며 긴 기다림의 결말이 어떨까 궁금해 했는데,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녀는 현재 미국에 살고 있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귀국하고 얼마 안 있어 다른 미군과 결혼을 했던 것이다.
나는 허탈함에 웃음이 나오려고 하는 것을 꾹 참고 있었다.
할머니는 몇 년에 한번씩 한국을 찾는다고 했다. 원하면 미국 주소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누쪼 할아버지는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찾지 않겠다고 했다. 잘 살고 있는 것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지난 60여년 동안 미안함과 아쉬움 속에서 마음의 짐이었던 그의 첫사랑이 결말을 찾은 것이다.
그 후, 할아버지는 더 이상 한국을 찾지 않았다. 대신 뉴욕에서 한국 사람들과 활발하게 어울리며 잊었던 자신의 젊음을 되찾고 있다고 했다.
첫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끝내지 못한 이야기가 있어서다.
누쪼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돌아가기전에 저녁 식사를 같이 하자고 했다.
한옥 마루에 앉아, 은은한 조명 아래서 식사를 마친 할아버지는 특유의 익살스런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와 결혼해 주겠니?’
그 순간 내 앞에는 20대 청년 누쪼가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