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갈지 모르지만,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했다.
당연한 수순이다.
제 자리에서 안정을 찾은 사람은 이리 방황할 일도 없을 테니. 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 생각을 조금씩 정리해나갔다. 나의 영역과 가치에 대한 인지를 바꾸어준 기획자, 상상을 현실로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개발자, 고민과 성장에서 오는 희열을 알려준 그로스 해커, 끊임없이 발전하는 경쟁자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나와 내가 만들 가치를 믿는 소중한 사람들. 미숙한 나를 세상 밖으로 꺼낸 방황은 이제 속삭인다. 다시 시작할 때가 됐다고. 익숙함에서 도망쳐, 새로운 영역으로 뛰어들 때가 됐다고. 나도 모르게 오만해지는 이 곳에서 다시 겸손을 갈구할 때가 됐다고.
연결-된-선택들
첫 번째, 두 번째 1년씩 거쳐간 전 회사들을 곱씹었다. 물론 그때는 이 정도 깊은 고민은 없었다. 그저 내가 뛰어놀고 싶은 큰 정글짐을 원했다. 나에게 PR대행사는 숫자를 주지 못했고, 디지털 마케팅 대행사는 권한(기획/데이터)을 주지 못했다. 내가 성장하고자 하는 방향에 비해 기존 정글짐은 너무 작았고 답답해하는 나를 인도해줄 사람도 없었다. 위(리더십), 옆(직무) 어디로 가든 후회가 없을 매력적인 정글짐을 두 번의 이직 끝에 찾았고, 드디어 자리를 잡았다. 그 후 2년 하고도 2개월이 지났다.
두 번의 이직이 알려준 나의 장점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대표님이 알려준 다양한 표현력. 어렸을 때부터 당연하게 생각했기에 장점으로 인식하지 못했던 것을 꺼내주었고 그것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해주었다. 덕분에 컨텐츠 영역에서부터 광고 크리에이티브까지 폭넓게 일했고, 당시 마케터는(PM인 팀장님을 제외하고) 나 혼자였던지라 힘껏 갈 수 있을 만큼 굴러다녀도 여유로운 정글짐이었다. 매체 데이터는 대행사에서 컨트롤해줬기에, UA(user acquisition) 퍼널에서 후행 데이터로 최적화하는 작업들을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광고 랜딩을 위한 페이지나 기존 웹 프로덕트를 기획/개선하는 일이 따라붙었고 자연스럽게 프론트(user-behavior) 데이터에 눈을 떴다.
그러던 차에 '500 Startups'의 시리즈A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두 달 가까이 새로운 마케팅에 눈을 떴다. 평소에는 만나기도 힘든 구루들로부터 Growth를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법을 배우느라 퇴근은 항상 10시를 넘겼지만, 단기에 폭발적인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귀중한 시간이었다. GA를 버리고 Amplitude를 도입했고, Automated Drip-campaign을 기획했다. 자연스럽게 Upper-funnel에서 lower-funnel로 넘어왔다. 곧 Amplitude가 보여주는 데이터로는 만족할 수 없었고, 마케터가 볼 수 있는 데이터는 무엇일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때 내 나머지 장점 - 빠른 러닝커브를 발견했다. 흥미가 생기는 순간 보이는 것 없이 닥치는대로 흡수하기 시작했다. 물론 순서가 좀 뒤바뀌었지만, R과 SQL을 건들고 데이터 구조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다. 잊고 살았던 전공책과 기억 저편에 남아있던 SAS 쿼리를 꺼내보기도 했다. Activation과 Retention을 위해 손수 SQL로 진행했던 캠페인들이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개발자분들이 구축해주신 데이터 웨어하우스가 새로운 정글짐이 됐고, 이제는 내가 원하는대로 데이터를 끌어다가 대시보드를 만들며 새로운 옷을 입기 시작했다. 단순히 데이터 접근 권한을 갖게 된 것을 넘어 Tableau(BI)에 ARPU, CLTV, Cohort 등을 구축하고 폭넓게 새로운 문제들을 정의하기 시작했다. 힘이 들어 지칠 때면 자존심이 채찍을 들어 어떻게든 남들 수준에 맞추도록 했다.
더-나은-선택
집요하게 분석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데이터는 양날의 검이었다. 생각보다 저조한 숫자에 절망감을 주면서도 무한한 개선의 여지를 열어줬다. 팀에서는 회사의 퍼포먼스를 총괄하도록 리더십 권한과 책임을 주었지만 아쉽게도 내 정글짐에는 이 고민을 함께할 팀원이 없었다. 그럴수록 밖으로 돌면서 더 뛰어난 사람들을 찾아다녔고, 그들로부터 얻은 에너지와 정보들이 나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했다. 그들과 나의 수준을 비교하며,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재료들을 하나 둘 찾기 시작했다. 나와 우리 팀이 직면한 치명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폭발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체감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팀 단위가 아니라 회사 전체의 변화를 만들어야 할 시점에 목소리를 낼 새도 없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KPI가 눈앞에 떨어졌다. 다시 UA 퍼널부터 마지막 퍼널 그리고 모든 고객 여정과 BEP를 계산하면서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좌절을 겪게 됐다.
답을 찾아서
몸과 마음이 약해진 틈을 타 고난이 온다 했던가. 생각했던 것보다 위기는 일찍 찾아왔다. 줄어들 생각 없이 0순위로 치고 들어오는 업무들,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 빠르게 키워내야 하는 주니어들. 위로 외친 말은 진척이 없고, 나만큼이나 바쁜 동료들은 제 할 일을 해쳐내기 바빠 보였다. 그렇게 에너지 고갈이 찾아왔다. 더 이상 스스로 힘을 내기 버거운 상태가 와 버렸다. 왜 하필 지금일까.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는 이 시점, 왜 잔인하게 그럴까.
힘을 낼 수 없다면 스스로를 다독여보자는 마음에 뒤를 돌았으나 생각보다 나는 초라했고 작았으며 말뿐인 공치사들로 범벅돼 있었다. 갑자기 내년, 그리고 내후년의 내가 그려지지 않았다.
익숙함에서 도망치는 일
그래서 좋게 말하면 도전, 나쁘게 말하면 도망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나를 유지하기에 너무 어려운 지경에 왔다는 것을 느꼈다면 제자리에서 서 있을 이유는 더더욱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나에게 인이 박혀버린 숫자들. 누군가 나를 툭 치고, 당장 내일 대출/투자 얼마가 진행되어야 하면 예산은 얼마나 필요하고, 매체는 어떤 것을 사용할 것이며, 전환 이후 캠페인은 어떻게 운영할 거냐 질문하면 나는 쉴 새 없이 삼십 분은 떠들 수 있다. 이렇게 익숙해져버린 영역 그리고 산업. 이런 나에게 어떤 유형의 성장이 필요한 것일까.
익숙한 직무로부터 도망쳐 새로운 직무에 도전해야 할까. 더 큰 범위의 데이터를 보며, input-merge-output-campaign-learning에 이르는 궁극의 CRM을 구축하듯이 말이다.
아니면 익숙한 산업으로부터 도망쳐 새로운 산업으로 도전해야 할까. 금융보다 더 복잡한 변수들(소위 더러운 데이터들)이 난무하는 커머스나 여행업처럼 말이다.
아니면 익숙한 위치로부터 도망쳐 새로운 위치로 도전해야 할까. 나무보다 숲을 보듯. 문제를 찾고 문제를 해결하는 기쁨보다, 누구나 문제를 찾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인프라를 만드는 위치로.
하루가 어떻게 마무리됐는지도 모르게 정신없는 일주일이었지만, 그 쪼갠 시간 속 고민들을 연결해보면 내가 지금 원하는 것은 명확하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존중이 있는 정글짐. 그리고 이미 반쯤은 완성된 청사진에 기꺼이 펜을 건네 함께 그릴 수 있도록 여유 있는 정글짐.
그리고 나라도 나를 위로해야겠다.
쉴 새 없이 달려온 그 시간에도 분명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