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별 May 27. 2024

세상의 속도가 너무 빠른 어른아이를 위해

히가시노 게이고, <녹나무의 파수꾼>


소미미디어 펴냄. 값 17,800


 우연히 들른 동네 중고서점에서 원가보다 저렴한 가격에 만났던 책이다. 인터넷 서점에서 보내온 신간 홍보 문자를 언뜻 본 기억이 있는데 책 맨 뒷장의 발행 정보를 보니 그게 벌써 2년 전인가 보다.


 일본에서 손꼽히는 다작 작가, 그리고 그 다작들이 모두 하나같이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하기로 유명한, 현대 최고의 재능을 지닌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름은 익히 들어봤지만 책 한 권을 전부 읽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 유명한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도 아직 읽어보지 못한 나였기에 서점에서 책을 사 와 책장에 꽂아놓고 한참이 지난 뒤에도 두꺼운 두께의 책을 손에 집는 덴 상당히 망설여졌지만....  최근 시간이 나서 드디어 읽어보게 되었다.


 막상 책을 열어보니 확실히 쉽게 읽히는 내용에, 분명 많은 고민과 함께 여러 번 다듬었을 쉬운 문체가 느껴져 책장이 한 장씩 넘어갈 때마다 감탄을 금치 못했다. 책이 내 손에 들어올 때까지 전문 번역가분의 손길을 여러 번 거쳤다 하더라도 작가가 쓴 원문 또한 이렇게 '쉬운 소설'을 표방하고 있기에 일본에서도 크게 히트했던 거겠지. 역시 베스트셀러 작가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닌가 보다.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사실은 내게 엄청난 재산이 숨겨져 있었다면?'
혹은 '숨겨진 재벌 가족이 있다면?'


 작품의 주인공 레이토는 조금 나쁘게 말하자면 별 볼일 없는 청년이다.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처럼 팍팍한 삶을 살아가는 그의 염세적인 시선에 세상은 늘 '태어난 김에 죽지 못해 살아가는 곳'이다. 아버지는 누구인지도 알 수 없고 호스티스 일을 하며 홀로 레이토를 키워낸 어머니는 일찍이 돌아가셨으며 노쇠한 할머니와 단 둘이 지내는 그는 회사의 부당한 해고로 방황하다 주거침입과 기물파손, 절도를 저지르며 유치장에 갇히게 된다.


 그러던 중 레이토는 숨겨진 부자 이모 치후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구속을 면하게 되고, 치후네는 막대한 합의금을 납부해 주는 것과 함께 감옥에 갈 위기에 처한 레이토를 빼내어 주는 대가로 월향신사의 거목 '녹나무 파수꾼' 일을 맡을 것을 제안하며 이야기는 전개된다.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나무의 동굴 안에서 양초를 피우고 아는 사람들만 안다는 특별한 의식을 치르면 그 사람이 염원하는 마음을 누군가에게 전해준다는 신묘한 녹나무.


 게다가 우두커니 나무만 지키고 있으면 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일이 꽤 복잡하다. 생판 처음 보는 부자 이모 치후네는 무슨 생각으로 레이토에게 이런 일을 떠맡겼을까? 이 신비하고도 아름다운 이야기의 끝에서, 어른도 아이도 아닌 '덜 자란' 청년 레이토는 상처를 딛고 더 나은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모두들 저마다 크고 작은 상처 한두 개쯤은 마음속에 떠안고 산다. 녹나무에 염원하는 마음을 보내면 녹나무가 나의 그 소중하고도 간절한 마음을 수신받길 원하는 사람에게 보내 준다는 동화 같은 설정도 마음에 들었지만, 추리 소설로 유명한 작가답게 탄탄한 필력이 독자를 매료시킨다. 녹나무 동굴 속을 담담하게 환히 밝히는 양초처럼 독자의 가슴을 울리는 반짝이는 반전은 지친 이들에게 다시금 인생이라는 숲을 헤치고 나아갈 희망을 안겨 준다.


 어른들의 동화 같은 작품을 보며 한 권의 소설이 주는 위안을 다시 한번 곱씹게 된다.

금요일 연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