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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는 사람 Jul 17. 2019

케빈에 대하여

익숙한 거와 좋아하는 거는 달라, 엄만 그냥 나에게 익숙한 거야!


나는 이 영화를 두 번 봤다. 두 번 보고 나니 엄마 에바와 아들 케빈의 마음, 시선 같은 것들이 각각 따로 더 잘 보였다. 지난번엔 엄마 에바 편에서 생각해 봤으니 오늘은  자식 케빈의 얘기도 좀 해 봐야겠지?



에바는 왜 케빈의 '이유'를 묻지 않았을까?


그들은 영화 마지막 장면에 가서야 너무 늦은 대화를 시작해 보지만 '때'를 놓친 대화란 침묵보다 별무소용인 것! 에바는 왜 케빈의 '이유'를 묻지 않았을까?

정희진은 '악에는 이유가 없으니 그 배경이나 이유를 묻지 말라'고 했다. 악은 악을 행하는 그 순간에 마침 이유가 있었을 뿐이니 악의 배경을 묻는 순간 가해자의 죄보다 피해자의 가책이나 만드는, 이유가 없는 악을 묻지 말라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케빈도 말했다.

 "이유 따위는 없어. 그게 중요해!"라던가 "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모르겠어"라고.


케빈이 이유를 잃어버릴 동안 에바는 왜 한 번도 묻지 않았을까? "왜 그랬니?"라고.

우리가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는 시청자나 피해자 가족이라면 악의 이유를 몰라도 된다. 악 자체에 대한 심판만 하면 된다. 그러나 시청자, 배심원이 아닌 엄마는 이유를 물어야 한다. 자식의 시원인 엄마는 심판자가 아닌 절망한 자식의 구원자가 돼야 하니까.

에바에게 케빈은 원치 않은 아이였고 흔히 말하는 타고난 모성은 없었지만 나름 열심히 노력했는데 케빈의  살인 이유가 꼭 자기인 것 같다. 케빈이 살인 후 감옥에 수감되고 2년이 될 때까지 몇 번의 면회를 하면서도 에바는 케빈과 거의 침묵만 지키다 나온다. 시선을 제대로 맞추지도 않고 왜 그랬냐고 한 번 묻지도 않는다. 그러다 케빈이 성인이 되는 18세를 얼마 안 남겨 둔 날이자 수감된 지 딱 2년이 되는 날의 면회에서야 겨우, 비로소 묻는다."왜 그랬니?" 이제 그 이유를 말할 때가 되지 않았니?

에바와 케빈은 처음으로 마주 보며 눈을 맞추고 케빈은 예전에 이유가 있었던 것도 같은데 이제 자기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한다. 에바가 케빈의 이유를 묻지 않은 것은 건조한 모성 때문만 아니라 그 이유가 자신이라는 대답을 들을까 봐 두려워서 묻지 않았던 건 아닐까? "이 모든 비극이 다 엄마 때문이야"라는 말을 아들 입에서 확인받는 게 두렵고 인정하기 싫은 마음. 케빈의 눈은 늘 "엄마 때문이야"라고 했는데 에바가 그 이유를 묻는데 짧게는 2년, 길게는 18년이 걸렸다. 18세는 성년이 되는 나이고 부모로서의 책임도 벗게 되는 날이다. 에바가 영화에서 엄마 역할극이 아닌 진심을 다 해 케빈을 안는 장면은 딱 두 번 나오는데 이 마지막 감옥 면회 신이 그중 하나다. 케빈이 유일하게 엄마의 포옹에 순응하는 장면과도 일치된다.


아들의 죄는 그 아들을 낳고 그렇게 키운 어미의 죄가 다. 희생자 부모와 이웃들의 갖은 모욕과 페인트 투척 등의 폭력을 다 견뎌 낸 것도 그런 어미의 죄 갚음, 죄의 기원에 대한 속죄였다. 그런데 이제 케빈은 내 책임을 그만해도 되는 성년이 된다.

'넌 조금 있음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되는 나이야. 나도 너에게서 벗어나도 되는 거지. 자, 나도 이제 들을 준비가 됐으니 이제 이유를 말해 주겠니?'


엄마 에바와 아들 케빈은 각자 다른, 합치할 수 없는 이유로  서로에게 상실감과 죄책감을 동시에 가지게 하는 대상이다. 에바에게 케빈은 세계를 누비던 자신의 손발을 묶어 자유를 상실하게 한 존재고 케빈에게 엄마는 충족되지 않는 근원이다. 특출나게 예민한 케빈은 갓난아기 때부터 엄마가 자신을 원치 않았고 의무적 모성 연기로 자기를 보살핌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자신이 엄마를 불행하게 한 존재라는 걸 아는 케빈은 침묵과 사악한 괴롭힘으로 에바의 죄책감을 자극하며 자신의 증오심을 드러낸다. 에바는 때론 죄책감도 느끼고 '저게 내 자식이라니!'라는 눈빛으로 힘들어하지만 한 번도 케빈 증오의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런데 케빈의 이유가 내가 아닌 '이유 없음'이라니 다행이지 뭔가! '그래, 나 때문이 아니라니 다행이다. 이유가 없다니 결국 내 잘못이 아니고 니 잘못이라는 거잖니'라며 자신의 죄책감을 벗게 된 안도와 평화의 눈빛 같았다. 그동안 에바가 케빈의 이유를 묻지 않았던 것은 에바 자신이 들을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 아들이 끝까지 이상한 쏘시오패스라서 속상한 게 아니라 나 때문이 아니라니 다행이라는 거다. 결국 에바는 자기 편한 식으로 케빈과 화해했지만 케빈도 에바처럼 화해가 된 것일까? 에바가 케빈을 안는 장면에서 에바의 표정에 잠깐 어떤 '이해'의 기미 같은 게 보인 듯도 하지만 그건 케빈에 대한 이해라기보다는 케빈과 자신에 대한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들었다는 안도 같았다. 이 장면을 에바의 모성 회복, 모자의 극적 화해로 긍정하거나 손쉽고 허무한 화해라며 아쉬워하는 이도 있겠지만, 내게는 그렇게 영악한 아들이 그토록 원하던 엄마에게 속아 넘어가는 것 같아 처음으로 케빈이 불쌍해졌다. 이유를 잃어버린 케빈이 18년 만에 엄마가 이유를 물었을 때 증오로 가득 차 있던 케빈의 눈빛은 처음으로 두려움에 떨렸다. 그동안 에바가 포기하지 못했던 것은 아들이 아닌 '아들의 이유'인데 그 이유가 내가 아니라니 에바는 구원을 받았을지 모르지만 케빈의 이유는 아무래도 상관없단 말인가!


에바는 감옥에 오기 전 대청소를 한다.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케빈의 방을 치우고 옷도 다린다. 비극의 화근이 된 동화책 '로빈훗'도 꺼내 놓고 페인트로 얼룩진 집도 싹싹 씻는다. 에바는 깨끗해진 집 문 앞에서 아주 홀가분한 미소를 날리며 이 제 곧 성년이 되는 케빈의 면회를 간다. 그 장면은 마치 이제 집을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엄마가 대청소를 하고 곰탕을 끓여 놓으며 "얘들아, 나 없어도 잘 먹고 잘 살아. 이젠 안녕!"이라는 마지막 선심 같았다. 에바가 처음으로 케빈의 '이유'를 물으며 모자 화해를 이루는 것 같은 이 장면은 어쩌면 에바의 마지막 면회 같다.

면회가 끝날 때 캐빈의 눈이 떨린 것은 엄마가 "왜 그랬니?"라고 묻는 순간이 에바가 자신을 진짜로 떠나는 그때인 줄 알아서 그랬는지는 영화 속 케빈만 알리라.



이유의 기원



케빈이 쏜 그 '화살'의 기원(이유)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면  케빈의 증오는 기원 없는 결과만 남는 것이다. 방향을  잃어버린 화살과 과녁처럼.

우리도 살다 보면 처음엔 어떤 이유를 위해 열심히 달렸는데 어느 날 보니 그 이유는 없고 열심히 달리는 모습만 남은 적 없는가? 이유를 잃어버리고 그저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엄마에 대한 케빈 최초의 '화해'의 도구였던 화살은 나중에 최후의 '무기'가 된다. 케빈의 과녁은 이유 없는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엄마나 자기 자신 아니었을까? 내가 엄마 너 때문에 화났다는 항변의 엉뚱한 과녘. 아버지와 동생, 무고한 학우들을 대량 사살한 케빈이 자신과 엄마는 살려 놓았던 것은 자기 시원에 관한 가장 잔인한 복수다. 살아서 엄마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지켜봐라, 인정하기 싫겠지만 그들을 죽인 게 네 뱃속에서 나온 놈이라는 걸 확인시키는 것보다 더 큰 복수가 있을까? 엄마를 죽이거나 자신을 죽이는 건 너무 쉬운 방법이니까.


아무나 케빈처럼 제 속의 화살을 엉뚱한 사람들에게 막 쏘고 살지는 않지만 누구나 제 속에 케빈의 화살 몇 개쯤은 품고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늘 '화해'와 '이해'의 삶을 훈계받지만 이 세상과 화해하기 싫을 때 없는가? 내가 왜 화났는지 묻지는 않으면서 화내지 말라고만 한다. 그리고 밖으로 드러난 화는 실상 대게는 자신에 대한 일 수 있다. 시대와의 불화니 타인과의 불화니 떠들어도 자신과의 불화가 더 문제다.



"익숙한 거와 좋아하는 거는 달라, 엄만 그냥 나에게 익숙한 거야"

. "엄만 나한테 익숙할 뿐이지 나를 좋아하는 건 아냐"    ​아즈라 밀러의 연기도 나무랄 데 없었지만 어린 케빈을 연기한 이 꼬맹이 싹수가 보통 아니다.

이 영화는 좁게 보면 모성과 자식에 관한 이야기지만 넓게 보면 소통이나 인간에 대한 이해로도 읽힌다. 사람에 대한 이해력에선 에바보다 꼬맹이 케빈이 한 수 위다. 유독 자신에게만 이해할 수 없는 증오심을 교묘하고 노골적으로 표출하는 케빈에게 에바가 "친구를 사귀어 보고 싶단 생각을 한 적은 없니?"라고 묻자 케빈은 필요 없다고 한다. 친구를 사귀면 좀 달라 질까 싶은 에바는 '익숙해지면 좋아질 거야'라고 하는데 케빈은 "익숙한 거와 좋아하는 거는 달라. 엄만 그냥 나에게 익숙한 거야'라고 대답한다.


 

상처는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뒷모습, 어깨, 발뒤꿈치 같은 곳. 보이는 정면은 감정과 상처를 속일 수 있지만 내가 단속하기 힘든 뒷모습은 방심한 마음을 들키기 쉽다. 평소 사람의 정면보다 후면에서 더 많은 연민과 상상과 여백을 느끼게 된다.

영화를 두 번째 봤을 때 서점에 걸린 엄마의 대형 사진 사진을 홀로 한참을 바라보던 케빈의 저 뒷모습이 영화 끝난 뒤에도 한참 남았다. 서점의 책과 사진을 보며 이 멋지고 자유로운 엄마의 날개를 꺾은 원인 제공자가 자신이라는 자책, 오롯이 자기만의 것이 되지 못하게 한 대상들에 대한  증오와 쓸쓸함이 같이 느껴졌다.

에바가 케빈의 이유를 몰랐던 것처럼 케빈 또한 에바의 이유를 이해하진 못했으리라.

엄마 이름 에바(Eva)는 인간의 시조모  이브의 라틴어고, 아들 케빈(Kevin)의 이름 뜻은 역설적이게도 '좋은 탄생'이었다.


영화에는 오래된 노래들이 많이 나온다. 우울하고 묵직한 영화 내용에 비해 리듬과 멜로디는 띵까띵까 순둥순둥 하지만 그 가사들은 참 이 영화 같다. 가사를 새겨들으면 케빈 화살의 이유를 조금 더 알 것 같기도 하고 케빈의 화살 한 발을 나도 살짝 맞은 것 같이 아리다. 영화 속에서 이 노래들이 자막과 같이 나올 때는 나도 모르게 케빈에게 감정 이입되어 눈썹이 살짝 젖더라.  영화 속 많은 노래들이 좋았지만 가장 좋던 두 곡.

https://youtu.be/-b5WsEDZvsE


https://youtu.be/tQ_j3FATQeo?list=PLEcCv8sdYW3ayJiZnjdlyDUesyUKd-t3m




같이 보면 좋을 영화

 자비에 돌란, <아이 킬더 마이 마더 I Killed My Mother> 2009

"엄마, 내가 오늘 죽으면 어떡할 거야?"

'그럼 난 내일 죽을 거야.'

자비에 돌란

영화 <케빈에 대하여>를 막 본 사람이라면 좀 착하고 심심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다. 무겁고 다의적인 케빈.... 에 비해 메시지가 명확하고 대중적이다.

내성적이고 표현력 없는 왕가위가 다시 젊어져서 수다스러워진다면 이렇지 싶은 영화.


'16살에 시나리오를 쓰고 19살에 영화로 만들어 <칸>을 제패한 이 청년 때문에 많은 16살과 19세가 자괴감을 느꼈겠구나. 주연, 의상, 제작, 감독, 각본까지 혼자 다 한 원맨쇼.

어린 나이의 감독은 '엄마, 가족 영화'를 여러 편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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