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슨 크루소와 김씨, 그리고 신생 철학과 섬
이런 식의 생활은 놀라울 정도로 즐겁게 느껴졌고, 단 한순간도 지루하지 않았다. 절제와 실천을 바탕으로 생활한 그는 아무 걱정 없이 밤을 보냈고 낮에는 즐겁게 생활했다.... 셀커크는 혼자 사는 게 아주 좋았다고 말했다. 원시적이고 자연적인 상황이었지만 감상적이고 유쾌한 외로움에서 마음의 평온을 얻을 수 있었다고 했다.
스틸은 "그는 다시 세상으로 돌아와 슬프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고, 홀로 평온함을 느낄 수 없어 자주 즐거움을 빼앗긴 기분이었다고 말했다."라고 썼다.
하나님이 내게 왜 이러시는 걸까? 나는 무슨 짓을 했기에 이런 대접을 받는가? 그 물음이 무슨 불온한 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금세 양심이 고개를 들었다. 생각건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철면피로다! 그대가 무슨 짓을 하였는지 묻는단 말인가! 끔찍하게 인생을 뒤돌아보고 그대가 하지 않은 일은 무엇인지 되물어 보라. 그대가 이미 오래전에 죽지 않은 이유를 물어보라.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을 어떤 규범과 율법으로 단죄해야 할지 모른다지만, 어떤 신이든 필연적으로, 그리고 그 존재의 본질상 무한히 거룩하며 정의롭게 마련이다. 그러니 불쌍한 야만인들이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벌을 받았더라도, 그들이 저지르는 죄악은 그들의 양심이 스스로 옳다고 믿는 규범을 어기는 행동인 것은 변함이 없다. 성경에서 율법이 없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 모두는 토기장이의 손에 든 진흙일 뿐인데, 그릇이 어찌 자신을 만든 이에게 왜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물을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무식하고 아무 생각이 없는 이교도들에게도 성직자 계급이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종교를 비밀스럽게 만들어 성직자들이 존경받을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은 가톨릭 교회뿐 아니라 세계의 모든 종교가 사용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땅의 왕이며 주인이었고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소유권이 있었다. 만일 어디론가 옮겨 갈 수만 있다면 영국에 영지를 가진 다른 영주들처럼 온전히 후대에 물려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마치 유럽 사람처럼 얼굴에 부드러움과 귀여움까지 흘렀다.... 브라질이나 버지니아에 사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처럼 지저분하고 기분 나쁜 황갈색이 아니라 올리브처럼 밝은 색이었다.
사금이나 향료, 상아는 말할 것도 없고 브라질에서 많이 필요한 흑인 노예도 아주 쉽게 구할 수 있다는 말도 곁들였다.
나는 개가 뭘 구해 오기를 바라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친구 노릇을 해주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오직 녀석이 말을 했으면 하는 생각뿐이었지만, 그렇게 될 리가 없었다. 앵무새와 이야기를 나누고 말을 가르치는 걸로 기분 전환을 했다.... 내 입 말고 다른 입에서 나는 소리를 들어본 것은 섬에 와서 처음이었다.
집에 돌아와 해먹 침대에 누웠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는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다. 머물 곳도 따로 정하지 않은 채 오랫동안 돌아다닌 일은 너무나 힘들었다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누리던 때보다 이렇게 혼자 남은 상황이 더 행복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해 주신 하나님께 겸허한 마음으로 진정한 감사를 드렸다.
온갖 괴로운 상황에도 섬에서의 삶은 과거에 부도덕하고 지긋지긋하며 형편없이 살던 인생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는 생각이 상당히 많이 들었다. 슬픔과 기쁨을 느끼는 게 변했고 희망하는 것도 달라졌다. 감정도 완전히 달라졌으며, 즐거움조차 처음에 섬에 왔을 때나 지난 2년 동안 느끼던 것과는 달랐다.
돈을 본 나는 웃음이 나왔다.
"오, 이런. 너희를 무엇에 쓰겠느냐? 내겐 아무런 가치도 없구나. 굴러다녀도 주울 필요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칼 한 자루가 너희 전부를 합친 것만큼 가치가 있다. 너희는 내게 아무런 쓸모가 없다. 지금 있는 그대로, 구할 가치가 없는 생물처럼 바다 깊숙이 가라앉아 버려라."
시간과 공을 들여 노력하고 궁리했더니 결국 필요한 물건은 모두 직접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소위 빵을 위해 일하는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빵 한 덩어리를 만들려면 밭을 갈고 곡식을 재배하고 수확을 하고 요리를 하는 등 온갖 소소한 일을 해내야만 했다.
언제나 1년 동안 먹을 정도의 식량을 미리 준비할 수 있는 정도로만 일했다.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은 우리에게 소용이 있는 만큼만 좋은 것이었다. 무엇이든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을 정도로 쌓아둔다고 해도 결국 우리가 쓰는 만큼만 좋은 것이지 그 이상은 아니었다. 섬에서는 가진 것 말고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고, 원하는 것 말고는 가질 필요가 없었다.
내게 벌어진 여러 가지 운명적인 사건이 묘하게도 같은 날짜에 겹쳤다는 게 기억이 났다. 그러니 내 죄 많은 인생과 쓸쓸한 인생은 같은 날짜에 시작된 것이다.
정반대의 상황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자신이 현재 처한 상황이 어떤지 도저히 알 수 없다. 그리고 자신이 누리는 것은 잃어보아야 그 가치를 알 수 있다.
우리의 삶을 아무리 몰락하게 하고 괴로움에 빠지게 한다고 해도 대개는 뭔가 감사할 구석을 남겨 두거나 우리 자신보다도 더 못한 상황에 부닥친 사람을 볼 수 있게 해 주신다는 점이다.
눈앞에 실제로 나타난 위험보다 천배는 더 무서운 건 바로 위험에 대한 두려움이다. 실제 불행보다 그런 불행을 걱정스러워해야 하는 마음의 부담이 훨씬 더 크다. 게다가 무엇보다 더 나쁜 건 그런 식의 문제 앞에서는 포기하는 마음조차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점이다.
나는 스스로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혹시라도 더 나쁜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하며 나쁜 일 가운데서도 그나마 다행인 것들을 꼽아보았다. 그리고 그런 내용을, 그러니까 내가 누리는 즐거움과 내게 괴로움을 주는 불행들을 매우 공정하게, 마치 차변과 대변에 기재하듯 적어보았다.
적어놓고 보니 이것은 아무리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상황에 빠진다고 해도, 반대로 감사해야 할 것이 전혀 없는 경우는 드물다는 것을 보여 주는 확실한 증거였다. 이런 내용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상황을 겪은 사람이 주는 교훈으로 삼을 수 있을 터였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나처럼 위안을 삼을 수 있는 걸 스스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며, 장점과 단점을 파악해서 대차대조표의 대변에도 뭔가 써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스스로 처한 상황에서 어두운 면보다는 밝은 면을 보는 법과, 필요한 걸 떠올리기보다 누리는 걸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 내가 볼 때 뭔가 부족해서 생기는 불만은 이미 가진 것들에 감사하는 마음이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다.
나는.... 특별히 기술을 배우지 않고 자랐다. 그래서인지 일찍부터 머릿속이 앞뒤 없는 생각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내가 떠나려고 하는 이유가 그저 아버지의 집과 이 나라를 벗어나고픈 방랑벽 말고는 없지 않냐고 말씀하셨다. 그냥 눌러앉으면 쉽게 일을 배울 수도 있고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큰돈을 벌어 편하고 즐겁게 살 수 있다고도 했다. 또 멀리 모험을 떠나 사업을 일으켜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한몫 잡으려는 사람들은 아예 가진 돈이 전혀 없거나, 주체할 수 없이 돈이 많지만 큰 뜻을 품은 경우가 많다고도 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러기에는 너무 넘치거나 모자라는 그런 사람이라고 했다. 내 삶은 중산층에 속한다고 할까..... 아버지는 그런 삶이 가장 좋은 상태이며 인간의 행복과 가장 잘 어울린다는 것을 오랜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고 했다. 중산층은 노동과 괴로움을 겪지 않아도 되며 상류층처럼 자존심이나 사치, 야망 그리고 더 잘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일로 괴로워하지 않아도 된다고도 했다......
그리고 현자 또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소서."라고 기도함으로써, 이것이 진정한 행복의 기준임을 말했다고도 했다."
아버지는 그 말을 깊이 생각해 보면 온갖 불행은 늘 상류층과 밑바닥 인생들이 나누어 가진다는 걸 알게 될 거라고 했다.
중산층의 삶은 온갖 장점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삶의 방식이었다...... 울컥 솟아오르는 시기심으로 화를 낼 일도 위대한 존재가 되고 싶은 비밀스러운 열망에 타오를 일도 없었다. 그저 편안한 상황 속에서 미끄러지듯 세상을 살아 나가기만 하면 된다는 것
섬에서 조용히 살 때보다 더 많은 걱정거리가 생겼다. 섬에서는 가진 것 말고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고, 원하는 것 말고는 가질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큰 책임을 져야만 했고 많은 재산을 지켜야만 했다. 가장 걸리는 건 종교 문제가 아니라 내 재산을 믿고 맡길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진화의 과정은 '정복'의 과정이나 마찬가지다..... 무자비한 엘리뜨주의를 자연계에 투영시킨 것이 진화론이다. 적자생존을 진화의 표준으로 삼는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생각이다.
자기 자신에 유리한 진보는 남에게 대해서는 퇴보여야 한다. 제한된 인간, 제한된 물질로 구성된 세계에 무한정한 양적 증대는 불가능한, 제한된 세계 속에서의 욕망의 확장이란 결국 다른 한편에 있어서의 욕망의 억제를 수반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주인의 욕망이 증대되는 것은 노예의 욕망이 억압되어야 함을 뜻하며, 아프리카의 욕망이 억제됨이 없이 유럽의 욕망이 증대될 수는 없는 일이다. 노예들의 퇴보가 바로 주인의 진보다. 유럽의 진화가 아프리카의 퇴화다. 유럽인이 사용하는 변소와 상수도와 기차가 아프리카에 조금 시설되어 있다고 해서 아프리카도 진보하였다고 우길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이용하는 자들 가운데 일부의 원주민들이 끼어 있다고 하더라고 그것은 원주민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유럽인들을 위해서인 것이다. 양계장에 분뇨시설과 급수시설, 그리고 사료 운반시설과 계란 운반시설이 현대화되었다고 해서 닭들이 진보의 환호성으로 '꼬꼬댁 꼬꼬!'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다..... 희랍의 진보는 페르샤의 죽음이며, 유럽의 진보는 아프리카의 죽음이다. 얼마나 이기적 진화며 이기적 발전이냐.
(70~72쪽)
달 사진을 찍는 이유는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없으면 외롭지 않으니까요.